시대의 상처 보듬는 생명의 정신…정찬 ‘완전한 영혼’

입력 2022.01.23 (21:22) 수정 2022.01.24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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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우리 시대의 소설입니다.

KBS와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소설 50편을 매주 이 시간 만나고 있습니다.

오늘(23일)은 1992년 발표된 정찬 작가의 소설 '완전한 영혼'입니다.

김석 기자가 소개합니다.

[리포트]

여기, 한 청년이 있습니다.

이름 장인하.

나이는 스물아홉.

[작가 낭독 : "1980년 5월 당시 장인하는 인쇄소 식자공이었다."]

[정찬/소설가 : "장인하는 생각을 표현하는 글자를 만질 수 있고,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데 대해서 굉장히 기쁨을 느끼는 노동자예요."]

그때 골목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리.

막다른 길에 몰린 남자가 총을 든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얻어맞는 상황.

1980년 5월 광주의 풍경.

이 모습을 본 장인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군인들에게 다가가고, 총을 빼앗으려다 머리를 맞고 쓰러집니다.

[정찬/소설가 : "천진함이죠. 어린아이 같은 영혼의 천진함 때문에 자기가 간절하게 이야기를 하면 뭔가 이렇게 막을 수 있다는 어떤 믿음을 갖고 다가갔거든요."]

그 사건으로 머리를 심하게 다쳐 소리를 못 듣게 된 장인하.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어떤 소리가 들립니다.

["엉엉엉."]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 앞에서 울부짖는 산 자들의 통곡.

그 소리들과 함께 5월 광주의 마지막 날까지 장인하는 시신들 곁을 지킵니다.

1987년 6월 항쟁의 환희는 그해 12월 대선으로 무참히 좌절되고, 1991년 시위 현장에서 살해된 강경대와 운동권 대학생들의 잇따른 분신.

그런 상처들이 쌓여 수많은 이의 분노를 깨우고 증오와 원한을 키웠지만, 장인하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권력의 폭력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

상처도, 고통마저도 넘어선 '식물적 정신'이었습니다.

[작가 낭독 :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고, 짐승의 이빨이 들어오면 찢기고, 꺾으면 꺾이고, 자르면 잘리는 식물."]

[정찬/소설가 : "우리가 잘 볼 수 없어서 그렇지 곳곳에 저는 있다고 생각해요. 존재하고 숨 쉬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식물적 영혼들이 우리 삶 속으로 흘러들어와서 뭔가 우리가 모르게 정화되는 그런 생명체들이 저희들 주변에 곳곳에 있다고 저는 믿거든요."]

작가가 1992년에 발표한 두 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완전한 영혼'.

단단한 사유, 예리한 통찰, 깊은 인간애가 어우러진 우리 소설 미학의 빛나는 성취로 꼽힙니다.

[구모룡/문학평론가·한국해양대 교수 : "폭력을 매개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과연 이 세상에 희망은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특히 이 작품이 그러한 정찬 작가의 원형질에 해당하는 그런 작품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언어가 때로는 폭력이 되어 공동체를 파괴하는 세태가 걱정스럽다는 정찬 작가.

그런 그에게 소설은 언어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소중한 생명체입니다.

[정찬/소설가 : "작가는 저는 장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생명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물건을 제대로 못 만들어요. 그러니까 사랑의 깊이가 그 작품의 깊이가 되는 거죠."]

KBS 뉴스 김석입니다.

촬영기자:김용모 유용규/문자그래픽:기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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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의 상처 보듬는 생명의 정신…정찬 ‘완전한 영혼’
    • 입력 2022-01-23 21:22:15
    • 수정2022-01-24 08:05:52
    뉴스 9
[앵커]

우리 시대의 소설입니다.

KBS와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소설 50편을 매주 이 시간 만나고 있습니다.

오늘(23일)은 1992년 발표된 정찬 작가의 소설 '완전한 영혼'입니다.

김석 기자가 소개합니다.

[리포트]

여기, 한 청년이 있습니다.

이름 장인하.

나이는 스물아홉.

[작가 낭독 : "1980년 5월 당시 장인하는 인쇄소 식자공이었다."]

[정찬/소설가 : "장인하는 생각을 표현하는 글자를 만질 수 있고,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데 대해서 굉장히 기쁨을 느끼는 노동자예요."]

그때 골목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리.

막다른 길에 몰린 남자가 총을 든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얻어맞는 상황.

1980년 5월 광주의 풍경.

이 모습을 본 장인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군인들에게 다가가고, 총을 빼앗으려다 머리를 맞고 쓰러집니다.

[정찬/소설가 : "천진함이죠. 어린아이 같은 영혼의 천진함 때문에 자기가 간절하게 이야기를 하면 뭔가 이렇게 막을 수 있다는 어떤 믿음을 갖고 다가갔거든요."]

그 사건으로 머리를 심하게 다쳐 소리를 못 듣게 된 장인하.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어떤 소리가 들립니다.

["엉엉엉."]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 앞에서 울부짖는 산 자들의 통곡.

그 소리들과 함께 5월 광주의 마지막 날까지 장인하는 시신들 곁을 지킵니다.

1987년 6월 항쟁의 환희는 그해 12월 대선으로 무참히 좌절되고, 1991년 시위 현장에서 살해된 강경대와 운동권 대학생들의 잇따른 분신.

그런 상처들이 쌓여 수많은 이의 분노를 깨우고 증오와 원한을 키웠지만, 장인하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권력의 폭력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

상처도, 고통마저도 넘어선 '식물적 정신'이었습니다.

[작가 낭독 :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고, 짐승의 이빨이 들어오면 찢기고, 꺾으면 꺾이고, 자르면 잘리는 식물."]

[정찬/소설가 : "우리가 잘 볼 수 없어서 그렇지 곳곳에 저는 있다고 생각해요. 존재하고 숨 쉬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식물적 영혼들이 우리 삶 속으로 흘러들어와서 뭔가 우리가 모르게 정화되는 그런 생명체들이 저희들 주변에 곳곳에 있다고 저는 믿거든요."]

작가가 1992년에 발표한 두 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완전한 영혼'.

단단한 사유, 예리한 통찰, 깊은 인간애가 어우러진 우리 소설 미학의 빛나는 성취로 꼽힙니다.

[구모룡/문학평론가·한국해양대 교수 : "폭력을 매개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과연 이 세상에 희망은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특히 이 작품이 그러한 정찬 작가의 원형질에 해당하는 그런 작품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언어가 때로는 폭력이 되어 공동체를 파괴하는 세태가 걱정스럽다는 정찬 작가.

그런 그에게 소설은 언어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소중한 생명체입니다.

[정찬/소설가 : "작가는 저는 장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생명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물건을 제대로 못 만들어요. 그러니까 사랑의 깊이가 그 작품의 깊이가 되는 거죠."]

KBS 뉴스 김석입니다.

촬영기자:김용모 유용규/문자그래픽:기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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