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인간의 사랑, 그 본질과 고양 -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입력 2021.11.21 (21:33) 수정 2021.11.21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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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이승우의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은 인간의 사랑의 욕망과 그 한계, 더 나아가 그 모든 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보다 큰 욕망의 가능성을 그 근본에서부터 탐구하고 있는 역작이다.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 벽두에 발표된 이 작품은 인간의 실존적 본질을 이루는 사랑의 문제에 천착해 온 이승우 문학의 전환점이 되는 소설로서 이 작품 이전의 사랑이 인간적 정욕과 이기적 욕망에 함몰된 모습, 그에 따른 고뇌였음에 반해 여기서는 그것을 넘어서려는 극복과 승화의 시도, 그 가능한 양식이 처절하게 펼쳐진다. 말하자면 이전의 사랑이 통념적 의미에서 인간의 사랑이라면, 우리가 기대하는 절대적인 사랑의 이념과 동경은 신의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대체로 물음표에 머물러 왔다. 문학과 작가의 능력에 앞서서 인간에게 과연 그러한 능력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항상 선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하나의 거대한 도전일 수 있다.


소설에는 청년 형제 우현과 기현이 나오고, 그들의 부모가 나온다. 우현을 사랑하는 그의 애인 순미가 나오는데, 그녀는 또 기현이 사랑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순미는 우현을 사랑하고 기현은 순미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들의 어머니에게는 결혼 전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남자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외로 증발되다시피 사라진다. 어머니는 그 남자의 애, 우현을 낳고 지금의 남편인 형제들의 아버지와 결혼한다. 우현은 군에서 사고로 다리를 잃고 순미를 기피한다. 그러나 순미는 그를 찾는다. '찾는다'고 했지만 여기서 동생 기현은 형과 순미 사이를 복원시켜 주려고 안타까운 노력을 행한다. 그 과정에서 기현 역시 순미를 좋아하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그 사랑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려는 더 큰 사랑으로 발현되고 포용된다. 한편 소설은 기현의 순미에 대한 사랑, 형에 대한 사랑이라는 큰 사랑으로 발전되고, 병든 노인으로 나타난 옛 애인에 대한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이라는, 또 다른 큰 사랑으로 이어지면서 이승우 특유의 포괄적인 사랑 탐구의 깊이가 모색된다. 대체 그 큰 사랑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비평적 관심이 된다. 자신을 던지고 사라지는 춘원시대 이래의 순애보적 귀결이 손쉬운 타협의 전형으로서 문학적 수준과 질을 저버렸다면, 이승우는 그와 달리 과연 어떤 독자적인 문학의 길을 여기서 열어줄 수 있을까.

이승우가 이 작품에서 펼쳐 보여주는 그 길은 나무에 있다. 우현이 순미를 거부하고 기현을 포함한 가족을 피하여 휠체어를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숲. 거기서 그는 소나무와 때죽나무를 안고 쓰러진다. 소나무를 칭칭 감고 있는 때죽나무 모습에서 나무들의 사랑을 발견한 우현은 자신의 사랑을 거기에 빙의시킨다. 그런가 하면 병들어 노인이 되어 돌아온 어머니의 남자는 남천이라는 남녘 땅에서 자신이 젊은 시절 지어 놓은 작은 집에 기거하는데 어머니는 그곳을 찾아간다. 그녀가 남천에서 본 것은 한 그루의 키 큰 야자나무. 이 나무도 그들 사랑의 뜻깊은 상징이 된다. 나무는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을 대신하면서 단순한 상징 이상의 그들만의 사랑을 실제로 행한다. 예컨대 그 모습은 이렇게 묘사된다.

<삼십오 년이 지난 후 그 두 사람이 저 야자수 아래에서 재회를 했다면 믿겠어요 ? (... ) 그 모습은 아름답고 감동스러웠어요. (....) 그것은 그들이 시간으로부터 보호되는 공간에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시간은 그들을 간섭하고 규정하고 구속해요. 야자나무는 그들의 염원과 사랑이 변신한 것이었어요. 그들은 ( ... ) 그들만의 성소에 들어와 있었던 거예요. -p.229>

야자나무는 이렇듯 사랑의 성소, 욕망이 승화된 자리가 된다. 그 변신의 과정과 양태는 때죽나무와 소나무, 즉 우현의 사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와 옛 애인, 우현과 순미, 흡사 두 가지 트랙으로 전개되는 것 같은 욕망 - 사랑 - 변신의 구조는 동일하다. 주목해야 할 점은 변신의 끝 나무가 비록 '성소'로 지칭되고 있지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의 두 대목이 의미 있게 음미될 필요가 있다.

<벼랑 위에는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하늘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떠받치고 있는, 애초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은 야자나무가 한 그루 있다. -p.274>

야자나무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는 묘사가 거듭 등장하면서 그 의미가 예사롭지 않은데, 마침내 남편, 즉 기현의 아버지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는 고백이 어머니의 입을 통해 나옴으로써, 이 모든 사랑의 둥근 원형이 보다 높은 질서의 힘에 의해 수행되고 있음이 암시된다. 이러한 암시는 이승우의 후반기 문학, 이를테면 2000년 이후 오늘에 이르는 심도 있는 사랑의 탐구가 종교의 영역에까지 접근하면서 그 풍성한 성취를 예감케 한다. 이들의 사랑은 고뇌를 감내하는 헌신 가운데에 더 큰 사랑의 가능성을 연다

<날이 밝으면 나는 형을 데리고 남천에 갈 것이다. 남천에는 순미가 있다.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녀는 형을 사랑한다. 어머니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녀는 형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순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p.273>


형을 사랑하는 순미, 순미를 사랑하는 형, 그 사람을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를 사랑하는 그 사람, 이들의 사랑은 지상의 결실을 거두기에 힘든 애틋함으로 인하여 나무가 됨으로써 그 욕망을 변신시킨다. 그러나 이 모든 사연을 알면서도 그 전체를 껴안고 도와주는 동생 기현과 아버지의 사랑은 나무 그 이상의 큰 사랑으로서 이 소설에서도 아직 이름이 없다. 이승우의 최근작, 혹은 앞으로의 작품은 아마도 그 큰 사랑의 이름 붙이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큰 사랑을 감당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을까. 현실과 환상이 섞여가면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사랑에 대한 폭넓은 울림을 주는 하나의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우화 속의 변신은 새로운 고양(高揚)의 가능성이다. 실제로 이승우의 이 작품 이후 후반부는 그것을 보여준다.

김주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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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평] 인간의 사랑, 그 본질과 고양 -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 입력 2021-11-21 21:33:56
    • 수정2021-11-21 21:36:04
    취재K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이승우의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은 인간의 사랑의 욕망과 그 한계, 더 나아가 그 모든 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보다 큰 욕망의 가능성을 그 근본에서부터 탐구하고 있는 역작이다.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 벽두에 발표된 이 작품은 인간의 실존적 본질을 이루는 사랑의 문제에 천착해 온 이승우 문학의 전환점이 되는 소설로서 이 작품 이전의 사랑이 인간적 정욕과 이기적 욕망에 함몰된 모습, 그에 따른 고뇌였음에 반해 여기서는 그것을 넘어서려는 극복과 승화의 시도, 그 가능한 양식이 처절하게 펼쳐진다. 말하자면 이전의 사랑이 통념적 의미에서 인간의 사랑이라면, 우리가 기대하는 절대적인 사랑의 이념과 동경은 신의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대체로 물음표에 머물러 왔다. 문학과 작가의 능력에 앞서서 인간에게 과연 그러한 능력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항상 선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하나의 거대한 도전일 수 있다.


소설에는 청년 형제 우현과 기현이 나오고, 그들의 부모가 나온다. 우현을 사랑하는 그의 애인 순미가 나오는데, 그녀는 또 기현이 사랑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순미는 우현을 사랑하고 기현은 순미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들의 어머니에게는 결혼 전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남자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외로 증발되다시피 사라진다. 어머니는 그 남자의 애, 우현을 낳고 지금의 남편인 형제들의 아버지와 결혼한다. 우현은 군에서 사고로 다리를 잃고 순미를 기피한다. 그러나 순미는 그를 찾는다. '찾는다'고 했지만 여기서 동생 기현은 형과 순미 사이를 복원시켜 주려고 안타까운 노력을 행한다. 그 과정에서 기현 역시 순미를 좋아하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그 사랑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려는 더 큰 사랑으로 발현되고 포용된다. 한편 소설은 기현의 순미에 대한 사랑, 형에 대한 사랑이라는 큰 사랑으로 발전되고, 병든 노인으로 나타난 옛 애인에 대한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이라는, 또 다른 큰 사랑으로 이어지면서 이승우 특유의 포괄적인 사랑 탐구의 깊이가 모색된다. 대체 그 큰 사랑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비평적 관심이 된다. 자신을 던지고 사라지는 춘원시대 이래의 순애보적 귀결이 손쉬운 타협의 전형으로서 문학적 수준과 질을 저버렸다면, 이승우는 그와 달리 과연 어떤 독자적인 문학의 길을 여기서 열어줄 수 있을까.

이승우가 이 작품에서 펼쳐 보여주는 그 길은 나무에 있다. 우현이 순미를 거부하고 기현을 포함한 가족을 피하여 휠체어를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숲. 거기서 그는 소나무와 때죽나무를 안고 쓰러진다. 소나무를 칭칭 감고 있는 때죽나무 모습에서 나무들의 사랑을 발견한 우현은 자신의 사랑을 거기에 빙의시킨다. 그런가 하면 병들어 노인이 되어 돌아온 어머니의 남자는 남천이라는 남녘 땅에서 자신이 젊은 시절 지어 놓은 작은 집에 기거하는데 어머니는 그곳을 찾아간다. 그녀가 남천에서 본 것은 한 그루의 키 큰 야자나무. 이 나무도 그들 사랑의 뜻깊은 상징이 된다. 나무는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을 대신하면서 단순한 상징 이상의 그들만의 사랑을 실제로 행한다. 예컨대 그 모습은 이렇게 묘사된다.

<삼십오 년이 지난 후 그 두 사람이 저 야자수 아래에서 재회를 했다면 믿겠어요 ? (... ) 그 모습은 아름답고 감동스러웠어요. (....) 그것은 그들이 시간으로부터 보호되는 공간에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시간은 그들을 간섭하고 규정하고 구속해요. 야자나무는 그들의 염원과 사랑이 변신한 것이었어요. 그들은 ( ... ) 그들만의 성소에 들어와 있었던 거예요. -p.229>

야자나무는 이렇듯 사랑의 성소, 욕망이 승화된 자리가 된다. 그 변신의 과정과 양태는 때죽나무와 소나무, 즉 우현의 사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와 옛 애인, 우현과 순미, 흡사 두 가지 트랙으로 전개되는 것 같은 욕망 - 사랑 - 변신의 구조는 동일하다. 주목해야 할 점은 변신의 끝 나무가 비록 '성소'로 지칭되고 있지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의 두 대목이 의미 있게 음미될 필요가 있다.

<벼랑 위에는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하늘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떠받치고 있는, 애초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은 야자나무가 한 그루 있다. -p.274>

야자나무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는 묘사가 거듭 등장하면서 그 의미가 예사롭지 않은데, 마침내 남편, 즉 기현의 아버지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는 고백이 어머니의 입을 통해 나옴으로써, 이 모든 사랑의 둥근 원형이 보다 높은 질서의 힘에 의해 수행되고 있음이 암시된다. 이러한 암시는 이승우의 후반기 문학, 이를테면 2000년 이후 오늘에 이르는 심도 있는 사랑의 탐구가 종교의 영역에까지 접근하면서 그 풍성한 성취를 예감케 한다. 이들의 사랑은 고뇌를 감내하는 헌신 가운데에 더 큰 사랑의 가능성을 연다

<날이 밝으면 나는 형을 데리고 남천에 갈 것이다. 남천에는 순미가 있다.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녀는 형을 사랑한다. 어머니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녀는 형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순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p.273>


형을 사랑하는 순미, 순미를 사랑하는 형, 그 사람을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를 사랑하는 그 사람, 이들의 사랑은 지상의 결실을 거두기에 힘든 애틋함으로 인하여 나무가 됨으로써 그 욕망을 변신시킨다. 그러나 이 모든 사연을 알면서도 그 전체를 껴안고 도와주는 동생 기현과 아버지의 사랑은 나무 그 이상의 큰 사랑으로서 이 소설에서도 아직 이름이 없다. 이승우의 최근작, 혹은 앞으로의 작품은 아마도 그 큰 사랑의 이름 붙이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큰 사랑을 감당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을까. 현실과 환상이 섞여가면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사랑에 대한 폭넓은 울림을 주는 하나의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우화 속의 변신은 새로운 고양(高揚)의 가능성이다. 실제로 이승우의 이 작품 이후 후반부는 그것을 보여준다.

김주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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