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한 판 굿으로 풀어낸 반도의 서사 - 황석영 ‘손님’

입력 2021.08.22 (21:30) 수정 2021.08.22 (21:35)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황석영의 『손님』을 읽으면서 근대 이후 남북 분단과 한국 전쟁을 계보로 한 우리 소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수많은 작가들이 이 문제를 고민해 왔고 또 그것을 서사화해 왔는데 과연 우리가 만족할만한 성과가 있었는가? 전쟁이 나고 50년이 흐르면 그 전쟁에 대해 객관적인 거리가 확보되어 그것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소설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늘 있어 왔다. 하지만 70여 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우리는 그 소설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듯이 이 하염없는 기다림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는 작가들의 역량 차원을 넘어 분단이나 한국 전쟁이 지니는 그 불가해한 측면에서 찾아야 할 문제인지도 모른다.

한국 전쟁이 지니는 불가해성은 우선 그 전쟁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서도 어떤 공통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 전쟁을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에서 촉발된 내전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 의한 대리전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6·25 전쟁이 그 안에 복잡성과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25 전쟁에 대한 규정 혹은 시각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즉 전쟁으로 인해 야기된 갈등, 대립, 증오를 넘어 어떻게 화해를 도모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화해의 문제는 우리 소설에서 제대로 다루어진 적이 없다. 가령 윤흥길의 「장마」는 한쪽(외삼촌)은 국군, 다른 한쪽(삼촌)은 빨치산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갈등하는 상황을 풀기 위해 구렁이를 통한 무속적인 제의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적 소품의 차원에서 시적 정서의 형태로 드러날 뿐이다. 이념으로 인한 갈등과 화해의 어려움은 제주 4·3이나 여순 사건의 진행 과정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분단과 전쟁을 다루고 있는 소설에서 이 두 가지 문제는 우리 작가들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황석영의 『손님』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그것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손님'이라는 이 소설의 표제가 잘 말해주듯이 그는 6·25 전쟁을 서양에서 들어온 두 손님인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손님 혹은 '마마'라는 말은 서양의 두 사상을 작가가 서양의 병(病)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상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인 인식의 이면에는 이 둘로 대표되는 서양의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비판은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사상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태도를 겨냥하고 있다. 즉 작가의 결론은 이 두 사상을 우리들이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시각은 그대로 6·25 전쟁 중 참극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황해도 신천 학살사건'에 적용된다. 3만 5천여 명에 해당하는 민간인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학살이 벌어진 원인이 외부(미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황해도 지역(은률, 신천, 재령 등)의 개신교도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에 있다는 것이다. 당시 가진 자들인 기독교도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인 사회주의자들이 토지 분배, 계급 모순, 이념 갈등 등의 과정에서 이 사상을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편의적으로 적용하여 이분법적인 선악 구도로 몰고 가면서 그런 참극이 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서로 얼굴을 맞대고 늘 감정과 행동을 일상 속에서 공유하던 사람들이 서로를 처참하게 살육하는 장면은 이성적인 인지와 이해, 판단을 불가능하게 한다. 작가는 이것을 어느 한쪽이 아닌 양쪽의 시각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학살이 이런 정도라면 현실에서 그것의 화해를 도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고민이 가장 깊어진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실제 북한을 방문해 황해도 신천 지역을 직접 돌아본 작가의 경험치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작가의 북한 방문과 신천 사건과 관련하여 증언해 줄 수 있는 생존자들과의 만남은 이 소설의 리얼리티를 구축하는 데 커다란 계기를 제공하고 있지만, 화해의 문제는 이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해를 위해서는 마땅히 화해 당사자가 주체가 된 논의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주체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거나 살아 있어도 그 기억을 되살려내기에는 너무 노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화해의 문제를 서사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작가 황석영은 이 한계를 훌륭하게 넘어선다. 그가 제시한 것은 바로 ‘굿’이다. 일찍이 그는 대하소설 『장길산』을 펴낸 뒤 장산곶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국민 만신 김금화를 모셔 굿판을 벌이기도 했고, 임진강 철조망 앞에서 통일기원 굿판을 기획하기도 했다. 굿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그것이 지니는 ‘해원(解冤)’ 의식을 『손님』 속 인물들이 한을 풀고 서로 화해하는 서사의 한 방식으로 가져오기에 이른다. 굿,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황해도 지방의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손님』의 서사 구조를 짠다. 이 굿은 기본적으로 원한 맺힌 자의 한을 무당을 통해 말이나 행위 등으로 풀어내게 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현재화라는 특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소설 속에서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가 한 곳(마당)에 모여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한을 자유롭게 풀어냄으로써 더 이상 한 맺힘이 없도록 하는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소설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장이 5장의 '화해 전에 따져보기'와 8장 '심판 마당'인 것이다.


이들 사이의 화해가 충분히 이루어졌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보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또 화해가 그런 형식적인 것의 수용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냐 하는 불만도 제기할 수 있다. 분단과 한국 전쟁을 계보로 한 저간의 우리 소설이 잘 말해주듯이 여기에서의 화해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에서 그가 시도한 이러한 형식은 서사의 지평을 넓히는 한 방법임이 분명하다. 또한, 이 형식은 그의 문학을 규정해온 리얼리즘의 세계를 넘어 사실(현실)과 환상(환영, 헛것)이 서로 넘나드는 '환상적 리얼리즘'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기존 서사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작가들이 견지해온 리얼리즘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예는 그렇게 흔치 않다. 황석영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손님이라고 칭하면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타의의 모더니티를 가지게 했다고 비판한 이면에는 '그렇다면 우리가 주체적 모더니티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의식과 실천을 담보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도 함께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재복/문학평론가·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비평] 한 판 굿으로 풀어낸 반도의 서사 - 황석영 ‘손님’
    • 입력 2021-08-22 21:30:23
    • 수정2021-08-22 21:35:25
    취재K
황석영의 『손님』을 읽으면서 근대 이후 남북 분단과 한국 전쟁을 계보로 한 우리 소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수많은 작가들이 이 문제를 고민해 왔고 또 그것을 서사화해 왔는데 과연 우리가 만족할만한 성과가 있었는가? 전쟁이 나고 50년이 흐르면 그 전쟁에 대해 객관적인 거리가 확보되어 그것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소설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늘 있어 왔다. 하지만 70여 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우리는 그 소설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듯이 이 하염없는 기다림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는 작가들의 역량 차원을 넘어 분단이나 한국 전쟁이 지니는 그 불가해한 측면에서 찾아야 할 문제인지도 모른다.

한국 전쟁이 지니는 불가해성은 우선 그 전쟁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서도 어떤 공통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 전쟁을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에서 촉발된 내전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 의한 대리전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6·25 전쟁이 그 안에 복잡성과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25 전쟁에 대한 규정 혹은 시각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즉 전쟁으로 인해 야기된 갈등, 대립, 증오를 넘어 어떻게 화해를 도모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화해의 문제는 우리 소설에서 제대로 다루어진 적이 없다. 가령 윤흥길의 「장마」는 한쪽(외삼촌)은 국군, 다른 한쪽(삼촌)은 빨치산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갈등하는 상황을 풀기 위해 구렁이를 통한 무속적인 제의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적 소품의 차원에서 시적 정서의 형태로 드러날 뿐이다. 이념으로 인한 갈등과 화해의 어려움은 제주 4·3이나 여순 사건의 진행 과정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분단과 전쟁을 다루고 있는 소설에서 이 두 가지 문제는 우리 작가들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황석영의 『손님』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그것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손님'이라는 이 소설의 표제가 잘 말해주듯이 그는 6·25 전쟁을 서양에서 들어온 두 손님인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손님 혹은 '마마'라는 말은 서양의 두 사상을 작가가 서양의 병(病)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상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인 인식의 이면에는 이 둘로 대표되는 서양의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비판은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사상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태도를 겨냥하고 있다. 즉 작가의 결론은 이 두 사상을 우리들이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시각은 그대로 6·25 전쟁 중 참극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황해도 신천 학살사건'에 적용된다. 3만 5천여 명에 해당하는 민간인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학살이 벌어진 원인이 외부(미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황해도 지역(은률, 신천, 재령 등)의 개신교도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에 있다는 것이다. 당시 가진 자들인 기독교도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인 사회주의자들이 토지 분배, 계급 모순, 이념 갈등 등의 과정에서 이 사상을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편의적으로 적용하여 이분법적인 선악 구도로 몰고 가면서 그런 참극이 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서로 얼굴을 맞대고 늘 감정과 행동을 일상 속에서 공유하던 사람들이 서로를 처참하게 살육하는 장면은 이성적인 인지와 이해, 판단을 불가능하게 한다. 작가는 이것을 어느 한쪽이 아닌 양쪽의 시각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학살이 이런 정도라면 현실에서 그것의 화해를 도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고민이 가장 깊어진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실제 북한을 방문해 황해도 신천 지역을 직접 돌아본 작가의 경험치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작가의 북한 방문과 신천 사건과 관련하여 증언해 줄 수 있는 생존자들과의 만남은 이 소설의 리얼리티를 구축하는 데 커다란 계기를 제공하고 있지만, 화해의 문제는 이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해를 위해서는 마땅히 화해 당사자가 주체가 된 논의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주체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거나 살아 있어도 그 기억을 되살려내기에는 너무 노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화해의 문제를 서사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작가 황석영은 이 한계를 훌륭하게 넘어선다. 그가 제시한 것은 바로 ‘굿’이다. 일찍이 그는 대하소설 『장길산』을 펴낸 뒤 장산곶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국민 만신 김금화를 모셔 굿판을 벌이기도 했고, 임진강 철조망 앞에서 통일기원 굿판을 기획하기도 했다. 굿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그것이 지니는 ‘해원(解冤)’ 의식을 『손님』 속 인물들이 한을 풀고 서로 화해하는 서사의 한 방식으로 가져오기에 이른다. 굿,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황해도 지방의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손님』의 서사 구조를 짠다. 이 굿은 기본적으로 원한 맺힌 자의 한을 무당을 통해 말이나 행위 등으로 풀어내게 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현재화라는 특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소설 속에서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가 한 곳(마당)에 모여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한을 자유롭게 풀어냄으로써 더 이상 한 맺힘이 없도록 하는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소설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장이 5장의 '화해 전에 따져보기'와 8장 '심판 마당'인 것이다.


이들 사이의 화해가 충분히 이루어졌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보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또 화해가 그런 형식적인 것의 수용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냐 하는 불만도 제기할 수 있다. 분단과 한국 전쟁을 계보로 한 저간의 우리 소설이 잘 말해주듯이 여기에서의 화해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에서 그가 시도한 이러한 형식은 서사의 지평을 넓히는 한 방법임이 분명하다. 또한, 이 형식은 그의 문학을 규정해온 리얼리즘의 세계를 넘어 사실(현실)과 환상(환영, 헛것)이 서로 넘나드는 '환상적 리얼리즘'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기존 서사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작가들이 견지해온 리얼리즘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예는 그렇게 흔치 않다. 황석영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손님이라고 칭하면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타의의 모더니티를 가지게 했다고 비판한 이면에는 '그렇다면 우리가 주체적 모더니티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의식과 실천을 담보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도 함께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재복/문학평론가·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시리즈

우리 시대의 소설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