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넌 정말 돌아오겠는가”…임철우의 ‘봄날’이 새긴 5·18

입력 2021.05.30 (21:31) 수정 2021.05.30 (21:32)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열흘의 정황, '전체'를 다루기

<봄날>은 1997년 11월부터 1998년 2월 사이 출간된 총 다섯 권, 2,000 페이지 내외 분량의 장편소설이다. 물론 5.18을 다루고 있다. 정확히는 1980년 5월 16일 새벽부터 5월 27일 새벽까지, 광주 시가지 곳곳에서 발생했던 상황들 ‘전체’를 다루고 있다. ‘전체’라고 강조하는 것은 이전에 발표되었던 작품들과 이 작품의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5.18을 소재로 한 소설들은 산발적이나마 꾸준히 발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한국문학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만한 작품들도 없지 않았다. 가령 1987년 민주화 정국 직후 발표된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최윤, 1988), 「깃발」(홍희담, 1988) 같은 작품들이 그 예다.

그러나 <봄날> 이전까지, 실은 그 이후로도, 그해 오월 열흘 동안의 항쟁 ‘전체’를 소설화한 사례는 없었다. <봄날>은 5.18의 거의 모든 진행 상황을 한 편의 소설 속에 담아내는 데 성공한 최초의, 그리고 ‘아직은’ 유일한 작품이다.

■ 소설보다 먼저, 일지를

그러나 ‘전체’라니! 말이 쉽지 열흘 동안, 그것도 광주 시가지 곳곳에서 발생한 수많은 돌발적 상황의 (40년이 지난 지금도 다 밝혀지지 않은) 정확한 추이를 한 편의 소설 속에 담아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선 규명되었거나 규명되지 않은, 구술되었거나 구술되지 않은, 목격되었거나 목격되지 않은, 그 모든 사실과 소문들의 취사선택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소설 이전에, 사실에 입각한 정확한 일지가 먼저 작성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우리는 5권 말미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상세한 “5.18 일지”가 소설보다 먼저 작성되었으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이 완성되는 데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던 사정도 이해가 간다.

기나긴 자료조사와 취재, 인터뷰 등을 통한 시간대별 일지의 완성……. 그러자 이제 다른 문제가 등장한다. 반드시 기록해야 할 그 무지막지한 사건들이 열흘 동안 서사적으로, 즉 소설적 플롯에 따라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점, 각각 다른 장소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점, 따라서 한두 명의 초점 인물로는 그 사건들 전체를 기록할 수 없다는 점, 그러려면 어떻게든 새로운 소설적 형식의 고안이 필요하다는 점 등등. 아마도 이 소설이 몇 시간 단위로 나뉜, 그리고 각각 초점 인물을 달리하는 86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지게 된 것은 그런 이유였으리라.


■실제 속으로 파견된 허구

일지에 따른 시간대별 86개의 시퀀스, 그렇다면 <봄날>은 일종의 다큐멘터리인가? 그렇지 않다. 실시간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사실성에의 집착은 물론 소설 <봄날>의 남다른 특징이다. 그것을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이 낳은 ‘정확성 강박’의 결과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봄날>은 르포가 아니라 잘 짜인 문학 작품이기도 한데, 철저하게 재구성된 1980년 5월 열흘 동안의 광주 시가지에서 그 모든 사건들을 조우하고 관찰하고 분노하고, 결국 ‘벌떼처럼 일어서다’라는 축자적 의미 그대로 ‘봉기’하는 주요 인물들은 허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주요 인물들, 그들은 바로 임철우의 직전작 <붉은 산, 흰 새>의 한씨네 일가, 즉 아버지 한원구와 그의 아들 무석, 명치, 명기, 그리고 딸 명옥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작가는 이 허구의 인물들을 개연성 있는 서사 진행 절차에 따라 실제 상황 속으로 ‘파견한다’. 무석은 광천동 인근으로, 명치는 공수부대로, 명기는 들불야학과 녹두서점과 전남대로, 명옥은 남동성당으로……. 그리고 다시 무석은 광천동에서 한기, 칠수, 봉배, 미순, 은숙과 연결되고 명치는 오하사와 유이병과 추상사와 연결되고, 명기는 정베드로(조비오) 신부와 윤상현(윤상원), 전영호, 김상윤, 김선출, 박효선, 김영철, 정상용, 윤강옥, 김종배(이들은 모두 실제 인물들이다) 들과 연결되고…….

요컨대 작가 임철우가 고안한 ‘소설적 파견’이라는 장치 덕분에 허구와 실제가 자연스럽게 습합된 채로, 당시 광주 곳곳의 거의 동시다발적인 상황이 낱낱이 묘사된다. 당연히 다섯 권의 책 속에는 총성과 신음과 절규와 구호와 함성과 선혈이 동시다발적으로 낭자하다. <봄날> 전권을 읽고 나면, 마치 1980년 오월 광주의 그 열흘 전체를 다 경험하고 난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다.

■나와 너의 내면들

임철우가 고안한 ‘소설적 파견’이 <봄날>에 가져다준 이점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열흘 속에 뛰어든 여러 군상들의 내면 묘사다.

명치와 그의 계엄군 동료들이 초점 인물로 등장할 때, 독자는 그간의 오월 소설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었던 공수부대원들의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내면을 읽게 된다. 야수성과 죄의식이 뒤얽힌 그들의 광란 속에서도 ‘오하사’처럼 매력적인 인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다.

무석과 한기, 봉배, 칠수 등이 초점 인물로 등장할 때 독자들은 이른바 ‘하층계급’ 시민들의 거칠고 순박하지만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읽게 된다. 일찌감치 광주를 빠져나간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행적은 물론 그들과 대비된다. 윤상현의 겸손하면서도 영웅적인 면모, 정베드로 신부의 진정어린 슬픔과 사제적 고뇌를 읽게 되는 것도 모두 그처럼 실제의 각 계층과 무리 속으로 합류해 들어간 허구 속 한씨네 아들딸들 덕분이다.

그중 명기는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인물이다. 작가의 내면이 가장 많이 투사된 인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전남대 영문과에 재학 중이고 박효선이 이끌던 ‘광대’, 김상윤의 ‘녹두서점’, 윤상원의 ‘들불야학’ 등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 그의 이력은 대체로 작가 임철우의 이력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가 소설가 지망생이란 점도……. 소설 말미 그는 윤상현의 권고대로 YWCA 건물을 떠났고,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생명의 연장이자 기나긴 죄의식의 시작이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고향 완도 인근의 한 섬으로 피신하는데 그 섬에는 시를 쓰는 스승이 산다.

임철우가 등단한 것은 다음 해인 1981년, 그러니까 그곳에서 명기는 아마도 소설가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신에게 약속하게 되리라. 그날들을 쓰겠다고……. 그리고 결국 <봄날>을 쓰고, <백년 여관>을 쓰고 <이별하는 골짜기>를 쓰고, <돌담에 속삭이는>을 쓰게 되리라. 그러니까 씻기지 않는 죄의식 속에서 국가폭력에 희생되어 죽어간 모든 억울한 주검들을 대신해 말하려는 샤먼이 되리라. 광주에서 살아남은 이후, 그러니까 임철우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비유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의사 체험과 같았던 것이다.

■넌 정말 돌아오겠는가

이 글을 쓰는 지금은 2021년 5월……. 5.18은 41년 전의 일이 되었고, <봄날>이 출간된 지는 23년이 지났다. 혹자는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아마도 예전 같았다면 항쟁 마지막 날, 윤상현(윤상원)의 영웅적인 마지막 독백을 여기 옮겨 그 답으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은 자들이 동일시하기에는 너무도 큰 별, 대신 오늘은 정베드로(조비오) 신부가 도청을 떠나면서 스스로에게 묻던 질문으로 그 답을 삼는다.

“넌 정말 돌아오겠는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겠는가……”

신부는 돌아가지 않았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후로 조비오 신부의 행적은 그가 평생 저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살았음을 입증한다. 살아남은 부끄러움으로 인해 그는 날마다 그날의 도청으로 돌아가야만 했으리라.

그런데 저 질문이 비단 조비오 신부 자신만을 향해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당시 열흘 동안, 광주에 있었건 없었건, 광주를 알았건 몰랐건, 심지어 그 이후에 태어나 이 땅에서 그 열흘과 무관하게 살아왔다 할지라도, 5.18에 빚진 것이 아닐까?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이 일말의 민주주의는 그 열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조비오 신부가, 아니 5.18의 사도 바울 임철우가 묻는다. ‘당신이 만약 그날의 사제였다면 당신은 도청으로 돌아갔겠는가?’ 그러므로 <봄날>을 읽는 것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책임과 부채의 문제이다.

김형중 문학평론가·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비평] “넌 정말 돌아오겠는가”…임철우의 ‘봄날’이 새긴 5·18
    • 입력 2021-05-30 21:31:40
    • 수정2021-05-30 21:32:16
    취재K

■ 열흘의 정황, '전체'를 다루기

<봄날>은 1997년 11월부터 1998년 2월 사이 출간된 총 다섯 권, 2,000 페이지 내외 분량의 장편소설이다. 물론 5.18을 다루고 있다. 정확히는 1980년 5월 16일 새벽부터 5월 27일 새벽까지, 광주 시가지 곳곳에서 발생했던 상황들 ‘전체’를 다루고 있다. ‘전체’라고 강조하는 것은 이전에 발표되었던 작품들과 이 작품의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5.18을 소재로 한 소설들은 산발적이나마 꾸준히 발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한국문학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만한 작품들도 없지 않았다. 가령 1987년 민주화 정국 직후 발표된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최윤, 1988), 「깃발」(홍희담, 1988) 같은 작품들이 그 예다.

그러나 <봄날> 이전까지, 실은 그 이후로도, 그해 오월 열흘 동안의 항쟁 ‘전체’를 소설화한 사례는 없었다. <봄날>은 5.18의 거의 모든 진행 상황을 한 편의 소설 속에 담아내는 데 성공한 최초의, 그리고 ‘아직은’ 유일한 작품이다.

■ 소설보다 먼저, 일지를

그러나 ‘전체’라니! 말이 쉽지 열흘 동안, 그것도 광주 시가지 곳곳에서 발생한 수많은 돌발적 상황의 (40년이 지난 지금도 다 밝혀지지 않은) 정확한 추이를 한 편의 소설 속에 담아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선 규명되었거나 규명되지 않은, 구술되었거나 구술되지 않은, 목격되었거나 목격되지 않은, 그 모든 사실과 소문들의 취사선택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소설 이전에, 사실에 입각한 정확한 일지가 먼저 작성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우리는 5권 말미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상세한 “5.18 일지”가 소설보다 먼저 작성되었으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이 완성되는 데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던 사정도 이해가 간다.

기나긴 자료조사와 취재, 인터뷰 등을 통한 시간대별 일지의 완성……. 그러자 이제 다른 문제가 등장한다. 반드시 기록해야 할 그 무지막지한 사건들이 열흘 동안 서사적으로, 즉 소설적 플롯에 따라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점, 각각 다른 장소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점, 따라서 한두 명의 초점 인물로는 그 사건들 전체를 기록할 수 없다는 점, 그러려면 어떻게든 새로운 소설적 형식의 고안이 필요하다는 점 등등. 아마도 이 소설이 몇 시간 단위로 나뉜, 그리고 각각 초점 인물을 달리하는 86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지게 된 것은 그런 이유였으리라.


■실제 속으로 파견된 허구

일지에 따른 시간대별 86개의 시퀀스, 그렇다면 <봄날>은 일종의 다큐멘터리인가? 그렇지 않다. 실시간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사실성에의 집착은 물론 소설 <봄날>의 남다른 특징이다. 그것을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이 낳은 ‘정확성 강박’의 결과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봄날>은 르포가 아니라 잘 짜인 문학 작품이기도 한데, 철저하게 재구성된 1980년 5월 열흘 동안의 광주 시가지에서 그 모든 사건들을 조우하고 관찰하고 분노하고, 결국 ‘벌떼처럼 일어서다’라는 축자적 의미 그대로 ‘봉기’하는 주요 인물들은 허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주요 인물들, 그들은 바로 임철우의 직전작 <붉은 산, 흰 새>의 한씨네 일가, 즉 아버지 한원구와 그의 아들 무석, 명치, 명기, 그리고 딸 명옥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작가는 이 허구의 인물들을 개연성 있는 서사 진행 절차에 따라 실제 상황 속으로 ‘파견한다’. 무석은 광천동 인근으로, 명치는 공수부대로, 명기는 들불야학과 녹두서점과 전남대로, 명옥은 남동성당으로……. 그리고 다시 무석은 광천동에서 한기, 칠수, 봉배, 미순, 은숙과 연결되고 명치는 오하사와 유이병과 추상사와 연결되고, 명기는 정베드로(조비오) 신부와 윤상현(윤상원), 전영호, 김상윤, 김선출, 박효선, 김영철, 정상용, 윤강옥, 김종배(이들은 모두 실제 인물들이다) 들과 연결되고…….

요컨대 작가 임철우가 고안한 ‘소설적 파견’이라는 장치 덕분에 허구와 실제가 자연스럽게 습합된 채로, 당시 광주 곳곳의 거의 동시다발적인 상황이 낱낱이 묘사된다. 당연히 다섯 권의 책 속에는 총성과 신음과 절규와 구호와 함성과 선혈이 동시다발적으로 낭자하다. <봄날> 전권을 읽고 나면, 마치 1980년 오월 광주의 그 열흘 전체를 다 경험하고 난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다.

■나와 너의 내면들

임철우가 고안한 ‘소설적 파견’이 <봄날>에 가져다준 이점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열흘 속에 뛰어든 여러 군상들의 내면 묘사다.

명치와 그의 계엄군 동료들이 초점 인물로 등장할 때, 독자는 그간의 오월 소설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었던 공수부대원들의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내면을 읽게 된다. 야수성과 죄의식이 뒤얽힌 그들의 광란 속에서도 ‘오하사’처럼 매력적인 인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다.

무석과 한기, 봉배, 칠수 등이 초점 인물로 등장할 때 독자들은 이른바 ‘하층계급’ 시민들의 거칠고 순박하지만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읽게 된다. 일찌감치 광주를 빠져나간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행적은 물론 그들과 대비된다. 윤상현의 겸손하면서도 영웅적인 면모, 정베드로 신부의 진정어린 슬픔과 사제적 고뇌를 읽게 되는 것도 모두 그처럼 실제의 각 계층과 무리 속으로 합류해 들어간 허구 속 한씨네 아들딸들 덕분이다.

그중 명기는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인물이다. 작가의 내면이 가장 많이 투사된 인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전남대 영문과에 재학 중이고 박효선이 이끌던 ‘광대’, 김상윤의 ‘녹두서점’, 윤상원의 ‘들불야학’ 등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 그의 이력은 대체로 작가 임철우의 이력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가 소설가 지망생이란 점도……. 소설 말미 그는 윤상현의 권고대로 YWCA 건물을 떠났고,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생명의 연장이자 기나긴 죄의식의 시작이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고향 완도 인근의 한 섬으로 피신하는데 그 섬에는 시를 쓰는 스승이 산다.

임철우가 등단한 것은 다음 해인 1981년, 그러니까 그곳에서 명기는 아마도 소설가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신에게 약속하게 되리라. 그날들을 쓰겠다고……. 그리고 결국 <봄날>을 쓰고, <백년 여관>을 쓰고 <이별하는 골짜기>를 쓰고, <돌담에 속삭이는>을 쓰게 되리라. 그러니까 씻기지 않는 죄의식 속에서 국가폭력에 희생되어 죽어간 모든 억울한 주검들을 대신해 말하려는 샤먼이 되리라. 광주에서 살아남은 이후, 그러니까 임철우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비유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의사 체험과 같았던 것이다.

■넌 정말 돌아오겠는가

이 글을 쓰는 지금은 2021년 5월……. 5.18은 41년 전의 일이 되었고, <봄날>이 출간된 지는 23년이 지났다. 혹자는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아마도 예전 같았다면 항쟁 마지막 날, 윤상현(윤상원)의 영웅적인 마지막 독백을 여기 옮겨 그 답으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은 자들이 동일시하기에는 너무도 큰 별, 대신 오늘은 정베드로(조비오) 신부가 도청을 떠나면서 스스로에게 묻던 질문으로 그 답을 삼는다.

“넌 정말 돌아오겠는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겠는가……”

신부는 돌아가지 않았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후로 조비오 신부의 행적은 그가 평생 저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살았음을 입증한다. 살아남은 부끄러움으로 인해 그는 날마다 그날의 도청으로 돌아가야만 했으리라.

그런데 저 질문이 비단 조비오 신부 자신만을 향해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당시 열흘 동안, 광주에 있었건 없었건, 광주를 알았건 몰랐건, 심지어 그 이후에 태어나 이 땅에서 그 열흘과 무관하게 살아왔다 할지라도, 5.18에 빚진 것이 아닐까?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이 일말의 민주주의는 그 열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조비오 신부가, 아니 5.18의 사도 바울 임철우가 묻는다. ‘당신이 만약 그날의 사제였다면 당신은 도청으로 돌아갔겠는가?’ 그러므로 <봄날>을 읽는 것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책임과 부채의 문제이다.

김형중 문학평론가·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시리즈

우리 시대의 소설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