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현기영의 ‘순이 삼촌’ - 홍기돈 문학평론가

입력 2021.05.16 (21:34) 수정 2021.05.16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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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요된 침묵과 맞서는 환청, 편견 속에서 확인되는 제주인의 정체성

현기영의 <순이 삼촌>을 '우리 시대의 소설'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제시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치열한 작가의식이며, 두 번째가 작품의 완성도다.

첫 번째 근거인 작가의식은 소재의 선택으로부터 말미암는 바가 크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어귀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사망하자, 국군 2연대 3대대는 북촌리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에 집결시켜 4백여 명을 집단학살하였다.

일명 북촌리 사건인 바, <순이 삼촌>의 주인공은 여기서 살아남은 인물이며, 작가는 이를 작품의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 작가의식의 두 층위 : 국가폭력 고발과 제주인으로서의 정체성

1987년 6월 항쟁이 성과를 거두기 이전까지 제주에서 벌어졌던 4·3은 언급조차 할 수 없는 금기의 영역이었다.

북촌리에서와 같은 학살로 제주 인구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이 무고하게 살육당했어도 가족 친지들은 그저 제삿날에 모여 수군거리기나 할 따름이었다. 사건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살벌하게 강요되었던 침묵에 맞선 작품이 1978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발표된 <순이 삼촌>이었으니 4·3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현기영의 작가의식은 응당 빛을 발하게 된다.

4·3 소재 작품을 발표하고 나선 현기영이 무탈했을 리 만무하다. 1979년 작품집 《순이 삼촌》이 출간되자 정보기관은 그를 끌고 가 삼 일간 주야로 모진 고문을 가해댔다.

어두운 시대에 작가는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가. 현기영은 《순이 삼촌》을 통하여 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펼쳐 보였다. 그렇지만 현기영의 작가의식이 4·3의 참상 고발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째서 4·3과 같은 비극이 제주에서 벌어졌던가를 따져 묻는 데까지 나아갔다. 서북청년단뿐만 아니라 "육지 사람들이 이 섬 사람이랜 허민 얕이 보는 편견이" 있었다는 추궁이 이에 해당한다. (63쪽)

기실 제주도는 오랜 기간 국가권력으로부터 내부 식민지 취급을 받아왔다.

예컨대 고려 말기에는 '목호의 난'이라 하여 최영이 이끄는 군대에 의한 탐라 진압이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제주인의 과거 응시의 기회를 제한하는 한편 제주인이 섬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가두어 놓는 정책(출륙금지령, 1629~1823)을 실시하였으며, 근대로 돌입하면서 고종은 '식민지' 제주를 근거로 대한 '제국'이 성립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육지 사람들이 제주도민을 얕잡아 보는 배경에는 그러한 역사가 작동하고 있었다. 4·3은 육지 사람들의 편견이 오랫동안 누적된 끝에 폭발한 참혹한 비극에 해당한다.

탈향한 제주인이라면 육지 사람들의 편견 속에서 자격지심이 들었을 법도 하다.

1961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상경한 현기영이 느꼈던 분위기가 바로 그러했다.

"나의 대학 시절에는 고향 선배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 중에 유능한 선배일수록 제 고향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어 적잖이 나를 실망시켰다. 출세지향적인 일부 선배들이 보여준 그러한 왜곡된 사고의 틀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나는 그 실체를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산문 <나의 문학적 비경 탐색>)

시간이 흐르면서 현기영은 자격지심에 찌든 왜곡된 사고의 틀이 4·3과 잇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4·3의 참상 조명은 제주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리하여 <순이 삼촌>의 작가의식은 온갖 편견에 맞서는 방편으로서 제주인의 정체성 추구라는 측면까지도 끌어안게 되었다.


■ 환청 앓는 순이 삼촌이 서울살이를 했던 까닭

작품의 성취도가 미흡하다면 작가의식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순이 삼촌>은 탄탄한 구성을 바탕으로 인물 형상화에 성공하였으므로 '우리 시대의 소설'로 꼽을만하다.

먼저 주인공 순이 삼촌을 보자. 삼십 년 전 빗발처럼 날아든 일제사격 가운데서 홀로 살아남은 그녀는 심한 신경쇠약 환자이며, 환청 증세까지 드러낸다.

여기서 '환청'이라는 장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권력은 침묵을 강요하지만, 순이 삼촌은 그날 그 장소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포박되어 있는 형국이다. 그러니까 순이 삼촌의 영혼을 뒤흔드는 요란하게 진동하는 총소리는 강요된 침묵에 맞선 증언의 면모를 띤다고 할 수 있다.

환청에 시달리는 순이 삼촌은 제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 출몰하는 원혼(冤魂)과 닮아 있다. 결국, 순이 삼촌은 사건이 벌어졌던 그 장소에서 죽음을 택하였으며, 그 죽음은 당시 사건의 진상이 펼치지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이 삼촌은 한 달 보름 전에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삼십 년 전 그날 그 밭에서 죽은 게 아닐까"(47쪽)라는 작품 화자(話者)의 생각은 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4·3의 참상 고발은 이처럼 순이 삼촌의 환청이 현기영의 손끝을 거쳐 문자로 물질화됨으로써 가능해질 수 있었다. 덧붙이건대 북촌리 사건의 절박한 상황에서 형성되는 제주 방언과 평안도 방언 사이의 팽팽한 긴장 또한 참상 고발과 관련한 또 하나의 문학적 장치로 꼽을 수 있다.

제주인의 정체성 확인이라는 작가의 의도는 순이 삼촌의 서울살이 일 년을 통하여 관철되고 있다.

이를 위하여 마련된 것이 제주인으로서의 면면을 드러내는 순이 삼촌, 순이 삼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내, 두 인물의 갈등 가운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화자의 구도다.

가령 "순이 삼촌이 하는 사투리를 아내는 알아듣지" 못하며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순이 삼촌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화자에게로 곧장 이월된다.

"서울말 일변도의 내 언어생활이란 게 얼마나 가식적이고 억지춘향식이었던가. 그건 어디까지나 표절인생이지 나 자신의 인생은 아니었다." (41쪽) 서울 사람인 아내는 배춧국의 멸치를 건져내지만, 순이 삼촌은 그걸 먹는다. 순이 삼촌의 식사량은 동네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기실 문화충돌 속에서 순이 삼촌이 느꼈을 수치심을 화자도 이미 겪은 바 있다. "아내가 무슨 일로 호적초본을 뗐다가 제 본적이 남편 본적인 제주도로 올라 있는 당연한 사실을 가지고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을 때 내가 느낀 수치심과 비슷한 것이었다." (40쪽)

<순이 삼촌>은 그와 같은 수치심을 씻겨 내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은폐되었던 4·3의 진상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야기된 충격이 워낙 강력했던 까닭에 제주인의 정체성과 관련 측면 및 작품 자체로서의 완성도는 다소 가려져 왔던 경향이 있다.

<순이 삼촌>의 평가를 둘러싼 아쉬운 대목이라 하겠다. 이후 현기영의 제주인의 정체성 확인 작업은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 타는 섬》과 같은 장편소설로 이어졌다.


홍기돈 문학평론가,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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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으로 삼은 판본은 1996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순이 삼촌》이다.
* <순이 삼촌>에는 4·3에서의 사망자가 5만 명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4·3에 대한 언급이 봉쇄되었던 집필 상황에서의 추산이었기에 집계 오류가 벌어졌을 터이다.
* 개항 이후 한국인들의 식사량은 꾸준히 감소하였다. 즉 식사량이 근대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 탈향 제주인이 본적을 이주한 지역으로 옮겨 버리는 양상은 제주 출신 작가의 여러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기영의 <해룡 이야기>에서도 이는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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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평] 현기영의 ‘순이 삼촌’ - 홍기돈 문학평론가
    • 입력 2021-05-16 21:34:13
    • 수정2021-05-16 21:34:38
    취재K
■ 강요된 침묵과 맞서는 환청, 편견 속에서 확인되는 제주인의 정체성

현기영의 <순이 삼촌>을 '우리 시대의 소설'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제시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치열한 작가의식이며, 두 번째가 작품의 완성도다.

첫 번째 근거인 작가의식은 소재의 선택으로부터 말미암는 바가 크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어귀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사망하자, 국군 2연대 3대대는 북촌리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에 집결시켜 4백여 명을 집단학살하였다.

일명 북촌리 사건인 바, <순이 삼촌>의 주인공은 여기서 살아남은 인물이며, 작가는 이를 작품의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 작가의식의 두 층위 : 국가폭력 고발과 제주인으로서의 정체성

1987년 6월 항쟁이 성과를 거두기 이전까지 제주에서 벌어졌던 4·3은 언급조차 할 수 없는 금기의 영역이었다.

북촌리에서와 같은 학살로 제주 인구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이 무고하게 살육당했어도 가족 친지들은 그저 제삿날에 모여 수군거리기나 할 따름이었다. 사건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살벌하게 강요되었던 침묵에 맞선 작품이 1978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발표된 <순이 삼촌>이었으니 4·3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현기영의 작가의식은 응당 빛을 발하게 된다.

4·3 소재 작품을 발표하고 나선 현기영이 무탈했을 리 만무하다. 1979년 작품집 《순이 삼촌》이 출간되자 정보기관은 그를 끌고 가 삼 일간 주야로 모진 고문을 가해댔다.

어두운 시대에 작가는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가. 현기영은 《순이 삼촌》을 통하여 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펼쳐 보였다. 그렇지만 현기영의 작가의식이 4·3의 참상 고발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째서 4·3과 같은 비극이 제주에서 벌어졌던가를 따져 묻는 데까지 나아갔다. 서북청년단뿐만 아니라 "육지 사람들이 이 섬 사람이랜 허민 얕이 보는 편견이" 있었다는 추궁이 이에 해당한다. (63쪽)

기실 제주도는 오랜 기간 국가권력으로부터 내부 식민지 취급을 받아왔다.

예컨대 고려 말기에는 '목호의 난'이라 하여 최영이 이끄는 군대에 의한 탐라 진압이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제주인의 과거 응시의 기회를 제한하는 한편 제주인이 섬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가두어 놓는 정책(출륙금지령, 1629~1823)을 실시하였으며, 근대로 돌입하면서 고종은 '식민지' 제주를 근거로 대한 '제국'이 성립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육지 사람들이 제주도민을 얕잡아 보는 배경에는 그러한 역사가 작동하고 있었다. 4·3은 육지 사람들의 편견이 오랫동안 누적된 끝에 폭발한 참혹한 비극에 해당한다.

탈향한 제주인이라면 육지 사람들의 편견 속에서 자격지심이 들었을 법도 하다.

1961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상경한 현기영이 느꼈던 분위기가 바로 그러했다.

"나의 대학 시절에는 고향 선배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 중에 유능한 선배일수록 제 고향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어 적잖이 나를 실망시켰다. 출세지향적인 일부 선배들이 보여준 그러한 왜곡된 사고의 틀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나는 그 실체를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산문 <나의 문학적 비경 탐색>)

시간이 흐르면서 현기영은 자격지심에 찌든 왜곡된 사고의 틀이 4·3과 잇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4·3의 참상 조명은 제주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리하여 <순이 삼촌>의 작가의식은 온갖 편견에 맞서는 방편으로서 제주인의 정체성 추구라는 측면까지도 끌어안게 되었다.


■ 환청 앓는 순이 삼촌이 서울살이를 했던 까닭

작품의 성취도가 미흡하다면 작가의식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순이 삼촌>은 탄탄한 구성을 바탕으로 인물 형상화에 성공하였으므로 '우리 시대의 소설'로 꼽을만하다.

먼저 주인공 순이 삼촌을 보자. 삼십 년 전 빗발처럼 날아든 일제사격 가운데서 홀로 살아남은 그녀는 심한 신경쇠약 환자이며, 환청 증세까지 드러낸다.

여기서 '환청'이라는 장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권력은 침묵을 강요하지만, 순이 삼촌은 그날 그 장소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포박되어 있는 형국이다. 그러니까 순이 삼촌의 영혼을 뒤흔드는 요란하게 진동하는 총소리는 강요된 침묵에 맞선 증언의 면모를 띤다고 할 수 있다.

환청에 시달리는 순이 삼촌은 제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 출몰하는 원혼(冤魂)과 닮아 있다. 결국, 순이 삼촌은 사건이 벌어졌던 그 장소에서 죽음을 택하였으며, 그 죽음은 당시 사건의 진상이 펼치지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이 삼촌은 한 달 보름 전에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삼십 년 전 그날 그 밭에서 죽은 게 아닐까"(47쪽)라는 작품 화자(話者)의 생각은 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4·3의 참상 고발은 이처럼 순이 삼촌의 환청이 현기영의 손끝을 거쳐 문자로 물질화됨으로써 가능해질 수 있었다. 덧붙이건대 북촌리 사건의 절박한 상황에서 형성되는 제주 방언과 평안도 방언 사이의 팽팽한 긴장 또한 참상 고발과 관련한 또 하나의 문학적 장치로 꼽을 수 있다.

제주인의 정체성 확인이라는 작가의 의도는 순이 삼촌의 서울살이 일 년을 통하여 관철되고 있다.

이를 위하여 마련된 것이 제주인으로서의 면면을 드러내는 순이 삼촌, 순이 삼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내, 두 인물의 갈등 가운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화자의 구도다.

가령 "순이 삼촌이 하는 사투리를 아내는 알아듣지" 못하며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순이 삼촌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화자에게로 곧장 이월된다.

"서울말 일변도의 내 언어생활이란 게 얼마나 가식적이고 억지춘향식이었던가. 그건 어디까지나 표절인생이지 나 자신의 인생은 아니었다." (41쪽) 서울 사람인 아내는 배춧국의 멸치를 건져내지만, 순이 삼촌은 그걸 먹는다. 순이 삼촌의 식사량은 동네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기실 문화충돌 속에서 순이 삼촌이 느꼈을 수치심을 화자도 이미 겪은 바 있다. "아내가 무슨 일로 호적초본을 뗐다가 제 본적이 남편 본적인 제주도로 올라 있는 당연한 사실을 가지고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을 때 내가 느낀 수치심과 비슷한 것이었다." (40쪽)

<순이 삼촌>은 그와 같은 수치심을 씻겨 내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은폐되었던 4·3의 진상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야기된 충격이 워낙 강력했던 까닭에 제주인의 정체성과 관련 측면 및 작품 자체로서의 완성도는 다소 가려져 왔던 경향이 있다.

<순이 삼촌>의 평가를 둘러싼 아쉬운 대목이라 하겠다. 이후 현기영의 제주인의 정체성 확인 작업은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 타는 섬》과 같은 장편소설로 이어졌다.


홍기돈 문학평론가,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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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으로 삼은 판본은 1996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순이 삼촌》이다.
* <순이 삼촌>에는 4·3에서의 사망자가 5만 명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4·3에 대한 언급이 봉쇄되었던 집필 상황에서의 추산이었기에 집계 오류가 벌어졌을 터이다.
* 개항 이후 한국인들의 식사량은 꾸준히 감소하였다. 즉 식사량이 근대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 탈향 제주인이 본적을 이주한 지역으로 옮겨 버리는 양상은 제주 출신 작가의 여러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기영의 <해룡 이야기>에서도 이는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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