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담아낸 코로나 시대…최은미 ‘여기 우리 마주’

입력 2021.09.12 (21:21) 수정 2021.09.1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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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우리 시대의 소설. 매주 이 시간 전하고 있습니다.

KBS와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으로 선정한 소설 50편을 하나하나 만나는 순서죠.

오늘(12일) 소개할 작품은 최근 소설입니다.

최은미 작가의 소설 '여기 우리 마주'입니다.

코로나 사태를 맞은 40대 기혼 여성의 일상을 통해 우리에게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있습니다.

정연욱 기자가 전합니다.

[리포트]

["비커에 소이 왁스를 담아 천천히 녹이고 용기의 밑바닥에 심지를 심었다. 그 안에 왁스를 붓고, 그 안에 오일을 섞고, 나무젓가락 사이에 심지를 끼워 고정했다."]

소설의 주인공 나리는 2020년 2월, 상가에 공방을 엽니다.

향초와 비누, 사람의 온기가 어우러지던 친밀한 공간, 하지만 3월 들어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하면서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집니다.

[최은미/소설가 : "굉장히 건전한 공간인 것 같지만, 사실은 누가 그 공간에서 어떤 상황에서 뭘 하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비난의 표적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것들을 설정하고 싶었어요."]

예약은 취소되고, 남편의 급여도 함께 줄었지만, 어김없이 빠져나가는 월세와 관리비.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되고 방역수칙이 강화될수록, 육아와 일 사이에서 위태롭던 40대 기혼여성의 일상은 더 불안해집니다.

[최은미/소설가 : "일과 육아와 가사를 병행하면서 지금 가족체계 안에서 겪고 있던 여성들이 코로나 상황과 맞물리면서 이 상황 자체가 극대화 된 거죠. 그 하중을 몇 배로 더 크게 느끼게 된 거죠."]

그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광경은 원격수업의 무료함에 시달리는 초등학생 딸의 일상.

방치할 수도, 도와줄 수도 없는 무력감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엄마 혼자 짊어져야 할 또 하나의 짐이 됩니다.

[최은미/소설가 : "제가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아동학대 예방 안내문이 정기적으로 온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것이 굉장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다들 알고 있는 거예요. 방역당국도 알고 있고 교육당국도 알고 있는 거예요."]

바로 그때 터져버린 이태원 발 집단감염.

모두가 힘겹게 억눌러 왔던 분노와 증오가 일제히 특정 집단을 향해 폭발했던 순간을 작가는 냉정하게 포착해 소설 속에 녹여냈습니다.

[최은미/소설가 : "특히 저는 기혼 여성이기 때문에 제도권에 있는 기혼 여성들이 자기 안의 혐오들을 어떻게 다른 약자들에게 전가하는지를 그 사건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해부터 코로나19 사태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들이 쏟아졌지만,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평범한 워킹맘들의 고독과 고통을 조명하며 단연 주목받은 소설입니다.

[오은교/문학평론가 : "일과 육아 사이에서 느끼는 고통, 그리고 완벽한 방역 주체가 되어야 하는 엄마로서의 고통이 잘 녹여낸 작품이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육아와 일과 방역을 병행하고 있는 여성들을 작가는 종이배를 타고 홀로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는 존재에 비유합니다.

[최은미/소설가 : "그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거기에 따른 죄책감, 자책 이런 감정적 몫까지 받아 안으면서 혼자서 책임지고 있는 그 고립감과 막막함에 대해서 얘기해보고 싶었어요."]

소설이 역사를 소환하는 방식은 앞서 현기영과 황석영을 통해 체험한 바 있습니다.

소설은 때로는 이렇게 동시대, 소시민들의 일상과 내면까지 그 어떤 장르보다 더 생생히 담아내기도 합니다.

KBS 뉴스 정연욱입니다.

촬영기자:조현관 박세준/그래픽:최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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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으로 담아낸 코로나 시대…최은미 ‘여기 우리 마주’
    • 입력 2021-09-12 21:21:57
    • 수정2021-09-13 09:43:44
    뉴스 9
[앵커]

우리 시대의 소설. 매주 이 시간 전하고 있습니다.

KBS와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으로 선정한 소설 50편을 하나하나 만나는 순서죠.

오늘(12일) 소개할 작품은 최근 소설입니다.

최은미 작가의 소설 '여기 우리 마주'입니다.

코로나 사태를 맞은 40대 기혼 여성의 일상을 통해 우리에게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있습니다.

정연욱 기자가 전합니다.

[리포트]

["비커에 소이 왁스를 담아 천천히 녹이고 용기의 밑바닥에 심지를 심었다. 그 안에 왁스를 붓고, 그 안에 오일을 섞고, 나무젓가락 사이에 심지를 끼워 고정했다."]

소설의 주인공 나리는 2020년 2월, 상가에 공방을 엽니다.

향초와 비누, 사람의 온기가 어우러지던 친밀한 공간, 하지만 3월 들어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하면서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집니다.

[최은미/소설가 : "굉장히 건전한 공간인 것 같지만, 사실은 누가 그 공간에서 어떤 상황에서 뭘 하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비난의 표적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것들을 설정하고 싶었어요."]

예약은 취소되고, 남편의 급여도 함께 줄었지만, 어김없이 빠져나가는 월세와 관리비.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되고 방역수칙이 강화될수록, 육아와 일 사이에서 위태롭던 40대 기혼여성의 일상은 더 불안해집니다.

[최은미/소설가 : "일과 육아와 가사를 병행하면서 지금 가족체계 안에서 겪고 있던 여성들이 코로나 상황과 맞물리면서 이 상황 자체가 극대화 된 거죠. 그 하중을 몇 배로 더 크게 느끼게 된 거죠."]

그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광경은 원격수업의 무료함에 시달리는 초등학생 딸의 일상.

방치할 수도, 도와줄 수도 없는 무력감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엄마 혼자 짊어져야 할 또 하나의 짐이 됩니다.

[최은미/소설가 : "제가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아동학대 예방 안내문이 정기적으로 온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것이 굉장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다들 알고 있는 거예요. 방역당국도 알고 있고 교육당국도 알고 있는 거예요."]

바로 그때 터져버린 이태원 발 집단감염.

모두가 힘겹게 억눌러 왔던 분노와 증오가 일제히 특정 집단을 향해 폭발했던 순간을 작가는 냉정하게 포착해 소설 속에 녹여냈습니다.

[최은미/소설가 : "특히 저는 기혼 여성이기 때문에 제도권에 있는 기혼 여성들이 자기 안의 혐오들을 어떻게 다른 약자들에게 전가하는지를 그 사건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해부터 코로나19 사태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들이 쏟아졌지만,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평범한 워킹맘들의 고독과 고통을 조명하며 단연 주목받은 소설입니다.

[오은교/문학평론가 : "일과 육아 사이에서 느끼는 고통, 그리고 완벽한 방역 주체가 되어야 하는 엄마로서의 고통이 잘 녹여낸 작품이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육아와 일과 방역을 병행하고 있는 여성들을 작가는 종이배를 타고 홀로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는 존재에 비유합니다.

[최은미/소설가 : "그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거기에 따른 죄책감, 자책 이런 감정적 몫까지 받아 안으면서 혼자서 책임지고 있는 그 고립감과 막막함에 대해서 얘기해보고 싶었어요."]

소설이 역사를 소환하는 방식은 앞서 현기영과 황석영을 통해 체험한 바 있습니다.

소설은 때로는 이렇게 동시대, 소시민들의 일상과 내면까지 그 어떤 장르보다 더 생생히 담아내기도 합니다.

KBS 뉴스 정연욱입니다.

촬영기자:조현관 박세준/그래픽:최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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