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선한 분노의 힘 - 최은영 ‘쇼코의 미소’

입력 2021.10.03 (21:32) 수정 2021.10.03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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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무한 경쟁의 악순환…자기 혐오와 우울의 내면화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성공적으로 포섭된 한국 사회에서 개별 주체들은 생존을 위한 각자도생의 삶에 내던져졌다.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이념을 위해 투쟁하는 진정성의 시대는 끝이 났지만, 양극화의 심화와 실업률 상승 등 경제적 생존을 위한 투쟁은 오히려 사회적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개별 주체에게 각인된 불안 심리는 사회적 소통과 연대의 확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각자의 생존을 위해 비윤리적 주체가 되기를 강요받거나 이러한 사회적 요구를 내면화하지 못한 이들은 도태의 낙인이 찍혀 자기 혐오와 우울을 내면화한다. 무한경쟁의 악순환 속에서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불안과 분노 역시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되기 쉽다. 가령 약자나 소수자에게 복수와 보복을 가함으로써 원한 감정을 해소하려는 ‘갑’들의 출현은 이러한 타락한 분노의 현실태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쇼코의 미소』(2016)

최은영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2016)가 출간된 이래 문단과 독자들의 고른 지지와 호응을 받은 데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을 시의적절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다만 최은영은 민주화 시대의 연대와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연대의 방식과 의미를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거창한 대의명분보다는 개별 주체들 간의 깊은 우애에 기반한 것으로 그려진다. 특히 그전까지 연대의 주체로 호명되지 못하였던 여성들의 관계성에 주목하는 양상이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를 비롯해서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미카엘라」 등의 소설에서 두드러진다. 여성들이 역사를 외면하거나 그와 동떨어진 채 살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의 삶 자체로 드러내 보여준다.

최근에 발간된 장편소설 『밝은 밤』(2021)에서도 그렇지만, 최은영은 대문자 역사에서 배제되어온 여성 주체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야기-기억을 구축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여성들을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로 호명해왔던 그간의 남성 중심 서사와 구분된다. 때로는 윤리적 책임을 완수해내는 역사의 주체로서, 때로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는 서술자로서 제 몫을 다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최은영의 소설에서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쇼코의 미소』는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개별 주체들 간의 관계망을 엮어내는가 하는 문제가 중심이 된다. 이를테면 「미카엘라」와 「비밀」은 세월호 참사를 전면적으로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여성들 사이의 소통과 연대를 통해 누구나 존엄하게 대우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격체라는 명제를 의미심장하게 상기시킨다.

「씬짜오 씬짜오」 역시 여성들의 친밀한 관계성을 경유하며 베트남 전쟁의 가해자로서 한국 사회의 책임을 묻는 수작이다. 1995년 통일이 된 독일에서 베트남인 투이네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 서술자의 가족들은 그들의 따스한 환대를 받으며 낯선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 그중에서도 서술자의 엄마는 응웬 아줌마와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고립된 삶에서 벗어나는 드문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지친 삶을 지탱해주던 이들의 관계망은 예기치 않은 사건에 의해 순식간에 와해되고 만다. 우연한 계기로 베트남 전쟁이 가족 간 식사 중에 화제에 오르고, 투이네의 일가친척이 한국인 군인에 의해 몰살당하다시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에 대해 무지했던 어린 서술자 ‘나’와 책임을 회피하려는 남편 사이에서 당혹스러워하던 서술자의 엄마는 사태를 수습하려 노력하지만 결국 역부족임이 드러난다.

이 작품을 통해 최은영은 가해자의 책임이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비극이 개별 주체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통찰한다. 아울러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끔찍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우애와 연대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을 포착해낸다. 「씬짜오 씬짜오」의 마지막 장면이 유독 감동을 주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서술자의 엄마는 응웬 아줌마를 오래 그리워하면서도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윤리적 태도를 고수하였다. 이제는 서른셋이 된 서술자가 응웬 아줌마가 재회하게 되었을 때, 서술자는 이들이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계성 회복을 위한 윤리적 실천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소설은 넌지시 이야기해준다.


사회와 관계 맺고 있는 개인…만남의 과정에서 삶이 풍부해지는 새로운 이야기

이처럼 개인이 부조리한 사회·역사와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를 최은영은 관계성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예를 들어 표제작 「쇼코의 미소」의 쇼코를 비롯해 최은영 소설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주체들은 자기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면서 타자를 사랑하는 데도 실패한다. 친밀성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으로 소중한 관계를 상실하고 만 「한지와 영주」의 영주나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사랑하는 이를 돌보지 못한 「먼 곳에서 온 노래」의 소은 역시 그렇다. 이들이 자기 혐오를 넘어 세대와 성별, 국적을 초월한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데는 이야기-기억의 힘이 작동하였다.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렇게 공고해진 관계망 속에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이야기-기억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질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아울러 최은영 소설에서 이러한 이야기-기억의 주체로서 여성들이 호명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모색하려는 시도와 관련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쇼코의 미소』에서 소위 ‘운동권’이라 불리는 정치세력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최은영 소설의 인물들은 어려운 시기에 투쟁을 이어간 점에 대해 운동권에 대한 막연한 존경을 보이는 한편으로, 그들이 현실에서 무력하게 패배해 버린 것에 대한 실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와 「미카엘라」에서 그려진다.

「먼 곳에서 온 노래」에서는 기존 운동권 세력의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가해지기도 한다. 이처럼 최은영은 여성 주체들을 중심으로 진정성에 기반한 80년대식 연대가 실패한 자리에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선한 분노의 힘'…실패와 어긋남 속에서 강하고 단단한 인물로 성장하는 사람들

최은영의 소설의 인물들은 회의하고 방황하면서도 차가운 분노를 지니고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선하다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착하다고 수식할 수는 없다. ‘착하다’는 수식어가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에 순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수식어로 곧잘 사용되는 데 비해 최은영 소설의 인물들은 잘 맞지 않는 옷을 걸친 듯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을 어색하고 불편해한다. 이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나약한 부적응자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할 테지만, 이들은 실패하고 어긋난 관계를 통과의례처럼 거쳐 가면서 강하고 단단한 인물로 성장해 간다. 특유의 예민함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우애와 연대의 길을 향해 나아간다.

사회적 안전과 인권, 진실과 정의를 매개할 공적 주체가 실종된 사회에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분노해야 할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데 상황의 개선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분노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보복이나 복수가 아니라 관계이고 사랑이다(마사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 최은영 소설 속 인물들 역시 여린 영혼들과의 관계망을 날실과 씨실로 촘촘하게 엮어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찾아내고 있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우애와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선한 분노의 힘을 배운다. 고통받는 이들과 어깨를 겯고 한 걸음씩 발을 내딛게 된다. 『쇼코의 미소』는 탈진정성 시대에 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윤리적 주체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안지영/문학평론가·청주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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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1-10-03 21:34:26
    취재K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무한 경쟁의 악순환…자기 혐오와 우울의 내면화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성공적으로 포섭된 한국 사회에서 개별 주체들은 생존을 위한 각자도생의 삶에 내던져졌다.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이념을 위해 투쟁하는 진정성의 시대는 끝이 났지만, 양극화의 심화와 실업률 상승 등 경제적 생존을 위한 투쟁은 오히려 사회적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개별 주체에게 각인된 불안 심리는 사회적 소통과 연대의 확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각자의 생존을 위해 비윤리적 주체가 되기를 강요받거나 이러한 사회적 요구를 내면화하지 못한 이들은 도태의 낙인이 찍혀 자기 혐오와 우울을 내면화한다. 무한경쟁의 악순환 속에서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불안과 분노 역시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되기 쉽다. 가령 약자나 소수자에게 복수와 보복을 가함으로써 원한 감정을 해소하려는 ‘갑’들의 출현은 이러한 타락한 분노의 현실태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쇼코의 미소』(2016)

최은영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2016)가 출간된 이래 문단과 독자들의 고른 지지와 호응을 받은 데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을 시의적절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다만 최은영은 민주화 시대의 연대와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연대의 방식과 의미를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거창한 대의명분보다는 개별 주체들 간의 깊은 우애에 기반한 것으로 그려진다. 특히 그전까지 연대의 주체로 호명되지 못하였던 여성들의 관계성에 주목하는 양상이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를 비롯해서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미카엘라」 등의 소설에서 두드러진다. 여성들이 역사를 외면하거나 그와 동떨어진 채 살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의 삶 자체로 드러내 보여준다.

최근에 발간된 장편소설 『밝은 밤』(2021)에서도 그렇지만, 최은영은 대문자 역사에서 배제되어온 여성 주체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야기-기억을 구축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여성들을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로 호명해왔던 그간의 남성 중심 서사와 구분된다. 때로는 윤리적 책임을 완수해내는 역사의 주체로서, 때로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는 서술자로서 제 몫을 다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최은영의 소설에서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쇼코의 미소』는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개별 주체들 간의 관계망을 엮어내는가 하는 문제가 중심이 된다. 이를테면 「미카엘라」와 「비밀」은 세월호 참사를 전면적으로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여성들 사이의 소통과 연대를 통해 누구나 존엄하게 대우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격체라는 명제를 의미심장하게 상기시킨다.

「씬짜오 씬짜오」 역시 여성들의 친밀한 관계성을 경유하며 베트남 전쟁의 가해자로서 한국 사회의 책임을 묻는 수작이다. 1995년 통일이 된 독일에서 베트남인 투이네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 서술자의 가족들은 그들의 따스한 환대를 받으며 낯선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 그중에서도 서술자의 엄마는 응웬 아줌마와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고립된 삶에서 벗어나는 드문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지친 삶을 지탱해주던 이들의 관계망은 예기치 않은 사건에 의해 순식간에 와해되고 만다. 우연한 계기로 베트남 전쟁이 가족 간 식사 중에 화제에 오르고, 투이네의 일가친척이 한국인 군인에 의해 몰살당하다시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에 대해 무지했던 어린 서술자 ‘나’와 책임을 회피하려는 남편 사이에서 당혹스러워하던 서술자의 엄마는 사태를 수습하려 노력하지만 결국 역부족임이 드러난다.

이 작품을 통해 최은영은 가해자의 책임이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비극이 개별 주체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통찰한다. 아울러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끔찍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우애와 연대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을 포착해낸다. 「씬짜오 씬짜오」의 마지막 장면이 유독 감동을 주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서술자의 엄마는 응웬 아줌마를 오래 그리워하면서도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윤리적 태도를 고수하였다. 이제는 서른셋이 된 서술자가 응웬 아줌마가 재회하게 되었을 때, 서술자는 이들이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계성 회복을 위한 윤리적 실천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소설은 넌지시 이야기해준다.


사회와 관계 맺고 있는 개인…만남의 과정에서 삶이 풍부해지는 새로운 이야기

이처럼 개인이 부조리한 사회·역사와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를 최은영은 관계성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예를 들어 표제작 「쇼코의 미소」의 쇼코를 비롯해 최은영 소설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주체들은 자기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면서 타자를 사랑하는 데도 실패한다. 친밀성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으로 소중한 관계를 상실하고 만 「한지와 영주」의 영주나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사랑하는 이를 돌보지 못한 「먼 곳에서 온 노래」의 소은 역시 그렇다. 이들이 자기 혐오를 넘어 세대와 성별, 국적을 초월한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데는 이야기-기억의 힘이 작동하였다.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렇게 공고해진 관계망 속에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이야기-기억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질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아울러 최은영 소설에서 이러한 이야기-기억의 주체로서 여성들이 호명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모색하려는 시도와 관련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쇼코의 미소』에서 소위 ‘운동권’이라 불리는 정치세력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최은영 소설의 인물들은 어려운 시기에 투쟁을 이어간 점에 대해 운동권에 대한 막연한 존경을 보이는 한편으로, 그들이 현실에서 무력하게 패배해 버린 것에 대한 실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와 「미카엘라」에서 그려진다.

「먼 곳에서 온 노래」에서는 기존 운동권 세력의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가해지기도 한다. 이처럼 최은영은 여성 주체들을 중심으로 진정성에 기반한 80년대식 연대가 실패한 자리에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선한 분노의 힘'…실패와 어긋남 속에서 강하고 단단한 인물로 성장하는 사람들

최은영의 소설의 인물들은 회의하고 방황하면서도 차가운 분노를 지니고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선하다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착하다고 수식할 수는 없다. ‘착하다’는 수식어가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에 순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수식어로 곧잘 사용되는 데 비해 최은영 소설의 인물들은 잘 맞지 않는 옷을 걸친 듯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을 어색하고 불편해한다. 이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나약한 부적응자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할 테지만, 이들은 실패하고 어긋난 관계를 통과의례처럼 거쳐 가면서 강하고 단단한 인물로 성장해 간다. 특유의 예민함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우애와 연대의 길을 향해 나아간다.

사회적 안전과 인권, 진실과 정의를 매개할 공적 주체가 실종된 사회에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분노해야 할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데 상황의 개선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분노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보복이나 복수가 아니라 관계이고 사랑이다(마사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 최은영 소설 속 인물들 역시 여린 영혼들과의 관계망을 날실과 씨실로 촘촘하게 엮어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찾아내고 있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우애와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선한 분노의 힘을 배운다. 고통받는 이들과 어깨를 겯고 한 걸음씩 발을 내딛게 된다. 『쇼코의 미소』는 탈진정성 시대에 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윤리적 주체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안지영/문학평론가·청주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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