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부재와 소외의 시학…최윤 ‘하나코는 없다’

입력 2022.01.09 (21:30) 수정 2022.01.09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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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는 젊은 시절의 한때를 함께 했던 또래 모임의 여성 ‘하나코’를 찾아 나선 ‘그’의 이탈리아 베네치아 여정(旅程)을 기록한 이야기이다. 여정의 서사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여로형(旅路形) 소설이지만, 여정이 주로 배경으로 기능하고 작품의 내면은 과거 사건에 대한 회상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액자형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정이 표면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면, 작품의 내면 서사는 과거에 대한 반추로서, 이는 「하나코는 없다」의 소설적 주제가 회상의 사건을 향해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하나 짚고 가야 할 대목은 그렇다고 이 작품의 여행 공간이 단순히 배경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주 무대인 베네치아는 ‘하나코’가 살고 있는 도시와 지근거리에 있어서 현실적으로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체류하는 공간이지만 서사의 내부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소설의 주제를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시적 비유의 장소로서 작용한다. 최윤 소설의 특징이기도 한 이러한 비유의 장치를 이 작품은 도입부에 설치해놓고 있다.

“폭풍이 이는 날에는 수로의 난간에 가까이 가는 것을 금하라. 그리고 안개, 특히 겨울 안개를 조심하라…… 그리고 미로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을 두려워할수록 길을 잃으리라”

수많은 운하의 물길이 도로를 대신하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좁은 길을 걷는 소설의 여정은 궁극적으로는 내면 서사의 핵심인 ‘하나코’, 그녀와 관련된 과거의 진실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녀가 산다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와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안개와 미로 같은 짧고 좁은 길과,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김없이 한끝이 드러나는 물 때문일까. 그렇지. 이상하게도 하나코 하면 물이 연상되었었다. 그래서 모두 마지막으로 자연스럽게 그 강변으로의 여행을 생각했는지도 몰라.” 작품의 중반부에서 ‘그’의 중얼거림을 기록하고 있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소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베네치아’가 ‘하나코’라는 인물의 성격을 환기하는 공간이자, 내면 서사의 핵심인 ‘낙동강 강변 여행의 사건’을 소환하는 장소임을 생각하게 된다.


대학졸업반에서 사회 초년생 시기, ‘그’를 포함한 일군의 또래 남성들과 한 시절을 함께 했던 한 여성(하나코)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에피소드는 ‘그’를 비롯한 남성들(남성 집단)의 실체를 사유하게 하는 과거이다. 특히 ‘하나코’가 이 남성 사회에서 떠나는 계기가 된 ‘낙동강 강변여행 사건’은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왜곡된 시각과 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서사의 핵심에는 ‘낙동강 강변여행 사건’이 있고, ‘그’의 베네치아 여정은 이 불편한 기억과의 대면이자 화해, 궁극적으로 ‘자아-찾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성격을 띤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은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회색 눈사람」)는 최윤의 명제가 이 소설의 ‘그’에게도 적용된 셈이다.

코가 예쁜 까닭에 ‘하나코’라는 별명(기표)으로 불렸던 여성은 또래 모임의 남성에게 격의 없는 친구이자 연정의 대상이었지만 어떤 남성도 진심을 갖고 그녀를 대하지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무리의 남성들 모두가 찾는 여성이었지만 ‘하나코’는 어떤 남성에게도 없는 존재였던 셈이다. 이 소설에서 ‘하나코’는 남성 주체의 부정성을 현시(顯示)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여러 남성-타자들의 요청과 필요를 적절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응대한다는 점에서 물을 닮은 수용성(水溶性)의 존재인데 반해,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들의 내면에 ‘하나코’는 부재하는 존재였으며, 서사가 종결되는 시점까지 이와 같은 관계의 부재는 끝내 회복되지 않는다. 작품에서 수차례 반복되는 남성 주체들을 향한 하나코의 항변 “그렇게 날 몰라요?”라는 물음은 이 소설의 주제인 진정한 관계의 부재와 소외의 문제를 단적으로 표상한다. 이러한 소설적 주제를 남녀 사이의 문제로 보면, 이 작품은 여성에 대한 남성들(집단)의 왜곡된 인식과 태도를 형상화하거나 진정한 관계성을 형성할 줄 모르는 남성 주체들의 부정성을 그린 서사로서, 혹은 진정성이 부재한 남녀관계를 다룬 서사로서 이른바 넓은 의미의 페미니즘적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당대로서는 상당히 선구적인 작품인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코는 남성들의 실체를 비춰주는 거울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관계성의 부재와 소외가 비단 남성(들)과 ‘하나코’로 상징되는 여성 사이뿐만 아니라 남성 상호 간에, 그리고 남성들의 부부관계 등에도 두루 편재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관계, 진정한 존재 탐색과 소외의 문제를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하나코’로 기표화된 ‘장진자’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그’, K, P, Y, J, W 등으로 익명화되어 있다는 점은 이를 시사한다. ‘진정한 관계의 부재와 소외’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최윤 소설의 큰 흐름인 진정한 자아 탐색, 진정한 존재의 가능성이라는 주제의식을 베네치아 여정 속에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불문학자이면서 1978년 평론 「소설의 의미구조 분석」을 『문학사상』에 수록하여 문단 활동을 시작한 이후, 1988년 중편 「저기 소리 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를 『문학과 사회』에 발표하여 소설가로 등단한 최윤은 1992년 「회색 눈사람」, 1994년 「하나코는 없다」로 각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매우 짧은 기간에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이다. 그의 소설의 한 흐름을 이루고 있는 폭압의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저기 소리 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 「아버지 감시」, 「벙어리 창」, 「회색 눈사람」 등―에서 최윤은 거대한 시대나 이념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의 부하 속에서 살아가는 변두리 개인의 내면 풍경을 담고자 했으며, 「하나코는 없다」 역시 관계의 진정성과 삶의 실재성(實在性)이라는 존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최윤이 등단하고 한국문단에 대표적인 작가로 부각되던 1990년을 전후로 한 연대는 거대 서사와 담론이 붕괴되는 시기였고, 한국소설은 이러한 시대적·사회적 문제를 기록하거나 도래하는 자본의 현실을 징후적으로 포착한 소설이 큰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개인과 존재의 문제를 다양한 문체로서 그려가는 최윤의 작업은 시대적 주류와는 결이 다른 지류를 형성해간 것이었지만, 그의 소설이 주목한 개인과 자아의 문제는 그 문제의식의 보편성으로 인해 문학사적인 관점에서는 선구적인 것으로, 그리고 현재까지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는 자질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문주/문학평론가·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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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09 21:30:29
    • 수정2022-01-09 21:31:04
    취재K
199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는 젊은 시절의 한때를 함께 했던 또래 모임의 여성 ‘하나코’를 찾아 나선 ‘그’의 이탈리아 베네치아 여정(旅程)을 기록한 이야기이다. 여정의 서사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여로형(旅路形) 소설이지만, 여정이 주로 배경으로 기능하고 작품의 내면은 과거 사건에 대한 회상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액자형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정이 표면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면, 작품의 내면 서사는 과거에 대한 반추로서, 이는 「하나코는 없다」의 소설적 주제가 회상의 사건을 향해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하나 짚고 가야 할 대목은 그렇다고 이 작품의 여행 공간이 단순히 배경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주 무대인 베네치아는 ‘하나코’가 살고 있는 도시와 지근거리에 있어서 현실적으로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체류하는 공간이지만 서사의 내부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소설의 주제를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시적 비유의 장소로서 작용한다. 최윤 소설의 특징이기도 한 이러한 비유의 장치를 이 작품은 도입부에 설치해놓고 있다.

“폭풍이 이는 날에는 수로의 난간에 가까이 가는 것을 금하라. 그리고 안개, 특히 겨울 안개를 조심하라…… 그리고 미로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을 두려워할수록 길을 잃으리라”

수많은 운하의 물길이 도로를 대신하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좁은 길을 걷는 소설의 여정은 궁극적으로는 내면 서사의 핵심인 ‘하나코’, 그녀와 관련된 과거의 진실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녀가 산다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와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안개와 미로 같은 짧고 좁은 길과,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김없이 한끝이 드러나는 물 때문일까. 그렇지. 이상하게도 하나코 하면 물이 연상되었었다. 그래서 모두 마지막으로 자연스럽게 그 강변으로의 여행을 생각했는지도 몰라.” 작품의 중반부에서 ‘그’의 중얼거림을 기록하고 있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소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베네치아’가 ‘하나코’라는 인물의 성격을 환기하는 공간이자, 내면 서사의 핵심인 ‘낙동강 강변 여행의 사건’을 소환하는 장소임을 생각하게 된다.


대학졸업반에서 사회 초년생 시기, ‘그’를 포함한 일군의 또래 남성들과 한 시절을 함께 했던 한 여성(하나코)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에피소드는 ‘그’를 비롯한 남성들(남성 집단)의 실체를 사유하게 하는 과거이다. 특히 ‘하나코’가 이 남성 사회에서 떠나는 계기가 된 ‘낙동강 강변여행 사건’은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왜곡된 시각과 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서사의 핵심에는 ‘낙동강 강변여행 사건’이 있고, ‘그’의 베네치아 여정은 이 불편한 기억과의 대면이자 화해, 궁극적으로 ‘자아-찾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성격을 띤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은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회색 눈사람」)는 최윤의 명제가 이 소설의 ‘그’에게도 적용된 셈이다.

코가 예쁜 까닭에 ‘하나코’라는 별명(기표)으로 불렸던 여성은 또래 모임의 남성에게 격의 없는 친구이자 연정의 대상이었지만 어떤 남성도 진심을 갖고 그녀를 대하지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무리의 남성들 모두가 찾는 여성이었지만 ‘하나코’는 어떤 남성에게도 없는 존재였던 셈이다. 이 소설에서 ‘하나코’는 남성 주체의 부정성을 현시(顯示)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여러 남성-타자들의 요청과 필요를 적절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응대한다는 점에서 물을 닮은 수용성(水溶性)의 존재인데 반해,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들의 내면에 ‘하나코’는 부재하는 존재였으며, 서사가 종결되는 시점까지 이와 같은 관계의 부재는 끝내 회복되지 않는다. 작품에서 수차례 반복되는 남성 주체들을 향한 하나코의 항변 “그렇게 날 몰라요?”라는 물음은 이 소설의 주제인 진정한 관계의 부재와 소외의 문제를 단적으로 표상한다. 이러한 소설적 주제를 남녀 사이의 문제로 보면, 이 작품은 여성에 대한 남성들(집단)의 왜곡된 인식과 태도를 형상화하거나 진정한 관계성을 형성할 줄 모르는 남성 주체들의 부정성을 그린 서사로서, 혹은 진정성이 부재한 남녀관계를 다룬 서사로서 이른바 넓은 의미의 페미니즘적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당대로서는 상당히 선구적인 작품인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코는 남성들의 실체를 비춰주는 거울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관계성의 부재와 소외가 비단 남성(들)과 ‘하나코’로 상징되는 여성 사이뿐만 아니라 남성 상호 간에, 그리고 남성들의 부부관계 등에도 두루 편재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관계, 진정한 존재 탐색과 소외의 문제를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하나코’로 기표화된 ‘장진자’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그’, K, P, Y, J, W 등으로 익명화되어 있다는 점은 이를 시사한다. ‘진정한 관계의 부재와 소외’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최윤 소설의 큰 흐름인 진정한 자아 탐색, 진정한 존재의 가능성이라는 주제의식을 베네치아 여정 속에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불문학자이면서 1978년 평론 「소설의 의미구조 분석」을 『문학사상』에 수록하여 문단 활동을 시작한 이후, 1988년 중편 「저기 소리 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를 『문학과 사회』에 발표하여 소설가로 등단한 최윤은 1992년 「회색 눈사람」, 1994년 「하나코는 없다」로 각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매우 짧은 기간에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이다. 그의 소설의 한 흐름을 이루고 있는 폭압의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저기 소리 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 「아버지 감시」, 「벙어리 창」, 「회색 눈사람」 등―에서 최윤은 거대한 시대나 이념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의 부하 속에서 살아가는 변두리 개인의 내면 풍경을 담고자 했으며, 「하나코는 없다」 역시 관계의 진정성과 삶의 실재성(實在性)이라는 존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최윤이 등단하고 한국문단에 대표적인 작가로 부각되던 1990년을 전후로 한 연대는 거대 서사와 담론이 붕괴되는 시기였고, 한국소설은 이러한 시대적·사회적 문제를 기록하거나 도래하는 자본의 현실을 징후적으로 포착한 소설이 큰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개인과 존재의 문제를 다양한 문체로서 그려가는 최윤의 작업은 시대적 주류와는 결이 다른 지류를 형성해간 것이었지만, 그의 소설이 주목한 개인과 자아의 문제는 그 문제의식의 보편성으로 인해 문학사적인 관점에서는 선구적인 것으로, 그리고 현재까지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는 자질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문주/문학평론가·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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