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혐오와 더불어, 사랑과 더불어…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입력 2021.12.26 (21:31) 수정 2021.12.26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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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1인칭 게이 화자 ‘나’를 중심으로 한 연작 소설집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의 불행”을 스스로 응시하고 감당하려는 퀴어 ‘나’가 세계와 관계 맺는 양상을 집약하여 퀴어 인식론의 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각 소설의 상호 텍스트적 연동, 유쾌한 농담과 애틋한 고백 사이를 재빠르게 오가는 박상영 특유의 서술은 소설집 전체를 퀴어 소설가 ‘나’의 구체적인 삶으로 모아낸다. 소설집은 그 자체로 동시대 한국 남성 성소수자 민족지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다종다양한 여성 혐오와 퀴어 혐오에 내재한 근원적 원리를 그려낸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엄마와 운동권 출신의 연인을 통해 진보적 민족 담론과 보수적 가족 이데올로기가 각각 ‘나’를 혐오하고 사랑하는 원리를 본다. 이를 정치적 논리와 사회학적 분석이 아니라 감정의 관찰을 통해 풀어낸다. 엄마는 “우리 가족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다 보면 등급표의 최상위권에 안착해 누구보다도 북유럽적으로 아름다운 삶을 이룩”할 수 있다는 가족 서사를 체화한 인물이다. 스스로 아름다운 가족이 되는데 (당연히) 실패한 엄마는 아들에게 이를 물려주기 위해 그를 교정하려 하고 바꾸려고 집착한다.

사회변혁의 열망을 몸에 새긴 “K 대학교 95학번. 76, 용띠”인 화자의 연인은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한 태도”를 갖고 있다. 이는 민족 주체의 (이성애적) 순수성을 더럽히는 “미제의 악습”인 “동성애라는 질병 혹은 징후”인 자신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자기혐오에서 기인한다.

두 사람을 통해 소설은 한국 사회의 근원적인 욕망인 가족과 민족, 보수와 진보, 종교와 이념을 아우른다. ‘나’는 그들 자신의 실패를 상기시키기 때문에 퀴어를 혐오한다는 점을 간파한다. 자신의 실패를 정면으로 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두려움에서 혐오가 온다는 원리를 발견하는 소설은 문학 특유의 감정학을 퀴어적으로 펼쳐낸다.


<재희>
<재희>는 여성과 퀴어에게 밀려오는 혐오의 차이와 공통점을 함께 본다. ‘나’와 재희는 “새내기 여자애들의 품평”을 통해 남성성을 증명하는 대학 문화나, 여성 청년의 주거안전을 위협하는 데이트 폭력에 맞서기 위해, 아우팅 협박과 상시적인 게이 혐오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정의 연대를 맺는다.

두 사람은 의료 담론이 여성과 퀴어의 몸을 포획하는 양상도 함께 경험한다. 임신중절수술을 받기 위해 방문한 병원에서 재희는, 여성의 신체는 재생산을 위한 “숭고한 성전”이므로 순결을 지켜야 한다며 ‘모성’과 무관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병리화하는 의료 담론의 민낯을 만난다. 격분한 재희는 병원의 자궁 모형을 들고 뛰쳐 나가버린다. 이 통쾌한 재희의 에너지는 요도염에 걸린 화자에게 “똥꼬충들”이란 혐오 발화로 동성애를 병리화하던 비뇨기과의 간호사를 상기시킨다.

‘정상적인 질병’과 ‘비윤리적인 질병’을 나누면서 유지되는 재생산-과학, 비규범적 여성과 퀴어에게 수치심을 훈육하는 윤리 체계를 보는 것이다. 그간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 그저 웃기만 했던 ‘나’는 재희를 통해 비로소 응전하는 법을 배운다.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여성과 게이 각자의 고유한 차이를 무화할 수 없고 비교할 필요도 없지만, 서로의 경험에 어떤 체계적 공통점과 연대의 지점도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좀 절실한” 두 사람의 유쾌한 수다는 퀴어-페미니즘의 흥미로운 결합지점을 보여준다. 물론 소설은 다만 낙관적인 전망으로 그치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 재희의 결혼식 장면은 남성 퀴어와 여성의 상이한 생애주기에 따른 연대 (불)가능성을 더 멀리까지 탐문하고 있다.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
표제작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비규범적인 몸이 겪는 제약, 퀴어에 대한 혐오를 다른 각도에서 면밀하게 본다. HIV를 경유한 혐오 발화는 퀴어가 고통받는 이유를, 사회적 권력 관계와 시민의 성원권 문제가 아니라 몸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치환하곤 한다. HIV 혐오는 ‘불행한 퀴어’라는 표상을 만든다. 차별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퀴어의 몸이 원래 불행한 것처럼 인과를 전도하는 것이다. 타인의 존재를 불행의 원인으로 고정시키고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 존재 자체를 부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 정치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HIV 담론을, 혐오세력의 병리화로부터 선취해 삶의 감각을 부여한다.

군 복무 중 휴가 때 (당시의) 남자친구에게 감염되어 PL이 된 ‘나’는 순식간에 강제 전역을 비롯한 사회적 배제를 겪게 된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장 먼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인 “독창적 별명 짓기”를 한다. HIV를 ‘카일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카일리 미노그를 듣다 꼬여버린 인생이라 카일리라고 지은 건 아니고, 그냥 이름이 예뻐서. 어차피 이것이랑 죽을 때까지 함께해야 할 판인데 나 듣기에 제일 예쁜 이름을 붙여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카일리.”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이 예쁜 이름은, 자기연민과 자기혐오를 넘는 최소이자 최대의 용기다. 인생이 꼬여버린 순간의 공포와 배제에 집착하지 않고, 타인의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이 되길 거부하고, HIV와 함께 살아가는 ‘나’의 에너지와 스스로 만들어 갈 생애에 집중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전유는 이성애 중심적인 일상의 시공간에 다른 순간을 불러들이는 퀴어의 언어적, 문화적 전략이기도 하다. 퀴어 헤테로토피아 이태원의 네온사인은 아름답게 빛난다. 여기서 ‘나’와 게이 친구들은 “와꾸만큼은 다들 180이 넘는 장정이”면서 “소녀 한 명씩을 품”고 ‘티아라’라는 독창적인 별명을 빌려 이성애적 젠더 역할/규범으로부터 벗어난 스스로를 재현/체현한다. 주중의 노동 시간에는 특정한 남성성에 대한 일관된 명령에 복종해야 했지만, 주말에는 그 강압이 일시적이나마 무너지고 자신의 몸을 더 유동적인 즐거움과 감응하게 한다.



퀴어 '지리학'의 확장
퀴어 공동체 문화와 공간적 특성에 대한 이러한 기술은 여러 퀴어 독자에게는 익숙한 동시대 문화의 문학적 재인이면서, 한편으로는 공동체 내부의 즐거운 정동과 기묘하게 섞여 종종 구분되지 않던 혐오와 공포 역시 새삼스레 마주하게 한다. “애들이랑 술 마실 때, 길에 보균자라고 소문난 애가 지나가면 개그 담당인” 친구가 이를 소재로 농담하고 다 같이 “실컷 웃다가 아 맞다, 내 몸에도 그게 있구나, 생각이 들면 그제야 등골이 서늘해지고 빳빳해”진다고 고백한다. 혐오 받는 하위 공동체 내부에서도 공포와 배제가 중첩되어 유통되는 감정 경제의 날카로운 단면이 노출되는 것이다.

퀴어의 존재를 상상하지 않고 상시적인 배제까지 일어나는 “무덤과도 같은 이곳” 서울이 “어울리지 않아”서 생겨나는 “매 순간 내 일상을 휘감는 이질감”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단 하나 있다. 규호. 카일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도 성실하게 곁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라고 말해주는 규호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규호는 매일 똑같은 ‘나’의 서울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꿔준다. 그래서 “이상하게 그가 나의 서울인 것만 같다.” 규호는 무기력한 ‘나’를 이끌고 나가 서울 곳곳의 데이트 명소에 퀴어의 사랑을 기입하고 대도시의 획일적인 질서를 조금씩 바꾸어간다.

풋풋한 시기를 거쳐, 약간의 권태기를 겪다가 동거를 하기도 하는 연인의 서사를 따라가던 ‘나’와 규호를 가로막는 것은 다시 혐오다. 취업 관문을 넘어도 신체검사에서 자신의 동의 없는 혈액 검사가 포함될까 봐 걱정해야 하고, 두 사람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넘으려 할 때도 혈액 검사는 발목을 잡는다.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규호지만, ‘나’는 그와 함께하면 삶의 경로마다 방해가 될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다.

그걸 “왜 웃으면서 말해. 슬프게”라면서 본인이 먼저 우는 규호는 ‘나’ 자신의 자기혐오를 모아 되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포장하지 않고 한없이 진실에 가깝게, 정말로 투명하게 치부까지 다 드러내는 사람은 규호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규호를 붙잡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말하지 못한다. 혹시라도 자신이 규호의 미래를 막는 것은 아닐까 싶어 규호를 먼저 밀어내는 ‘나’의 두려움과 그것이 못내 서운한 규호의 마음 사이에서, <대도시의 사랑법>은 애틋한 연애 소설이 된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를 윤리적 시혜의 대상으로만 가까스로 재현하거나, 진중한 저항 운동의 필요성을 환기하던 비극적이고 비장한 재현 관습에서 벗어나 있다. 혐오와 더불어 살면서도 굴하지 않고 웃고 울고 헤어지고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우리 시대 퀴어 청년의 목소리로 전하는 일상 이야기다.

김건형/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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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평] 혐오와 더불어, 사랑과 더불어…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 입력 2021-12-26 21:31:18
    • 수정2021-12-26 21:31:39
    취재K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1인칭 게이 화자 ‘나’를 중심으로 한 연작 소설집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의 불행”을 스스로 응시하고 감당하려는 퀴어 ‘나’가 세계와 관계 맺는 양상을 집약하여 퀴어 인식론의 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각 소설의 상호 텍스트적 연동, 유쾌한 농담과 애틋한 고백 사이를 재빠르게 오가는 박상영 특유의 서술은 소설집 전체를 퀴어 소설가 ‘나’의 구체적인 삶으로 모아낸다. 소설집은 그 자체로 동시대 한국 남성 성소수자 민족지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다종다양한 여성 혐오와 퀴어 혐오에 내재한 근원적 원리를 그려낸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엄마와 운동권 출신의 연인을 통해 진보적 민족 담론과 보수적 가족 이데올로기가 각각 ‘나’를 혐오하고 사랑하는 원리를 본다. 이를 정치적 논리와 사회학적 분석이 아니라 감정의 관찰을 통해 풀어낸다. 엄마는 “우리 가족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다 보면 등급표의 최상위권에 안착해 누구보다도 북유럽적으로 아름다운 삶을 이룩”할 수 있다는 가족 서사를 체화한 인물이다. 스스로 아름다운 가족이 되는데 (당연히) 실패한 엄마는 아들에게 이를 물려주기 위해 그를 교정하려 하고 바꾸려고 집착한다.

사회변혁의 열망을 몸에 새긴 “K 대학교 95학번. 76, 용띠”인 화자의 연인은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한 태도”를 갖고 있다. 이는 민족 주체의 (이성애적) 순수성을 더럽히는 “미제의 악습”인 “동성애라는 질병 혹은 징후”인 자신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자기혐오에서 기인한다.

두 사람을 통해 소설은 한국 사회의 근원적인 욕망인 가족과 민족, 보수와 진보, 종교와 이념을 아우른다. ‘나’는 그들 자신의 실패를 상기시키기 때문에 퀴어를 혐오한다는 점을 간파한다. 자신의 실패를 정면으로 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두려움에서 혐오가 온다는 원리를 발견하는 소설은 문학 특유의 감정학을 퀴어적으로 펼쳐낸다.


<재희>
<재희>는 여성과 퀴어에게 밀려오는 혐오의 차이와 공통점을 함께 본다. ‘나’와 재희는 “새내기 여자애들의 품평”을 통해 남성성을 증명하는 대학 문화나, 여성 청년의 주거안전을 위협하는 데이트 폭력에 맞서기 위해, 아우팅 협박과 상시적인 게이 혐오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정의 연대를 맺는다.

두 사람은 의료 담론이 여성과 퀴어의 몸을 포획하는 양상도 함께 경험한다. 임신중절수술을 받기 위해 방문한 병원에서 재희는, 여성의 신체는 재생산을 위한 “숭고한 성전”이므로 순결을 지켜야 한다며 ‘모성’과 무관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병리화하는 의료 담론의 민낯을 만난다. 격분한 재희는 병원의 자궁 모형을 들고 뛰쳐 나가버린다. 이 통쾌한 재희의 에너지는 요도염에 걸린 화자에게 “똥꼬충들”이란 혐오 발화로 동성애를 병리화하던 비뇨기과의 간호사를 상기시킨다.

‘정상적인 질병’과 ‘비윤리적인 질병’을 나누면서 유지되는 재생산-과학, 비규범적 여성과 퀴어에게 수치심을 훈육하는 윤리 체계를 보는 것이다. 그간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 그저 웃기만 했던 ‘나’는 재희를 통해 비로소 응전하는 법을 배운다.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여성과 게이 각자의 고유한 차이를 무화할 수 없고 비교할 필요도 없지만, 서로의 경험에 어떤 체계적 공통점과 연대의 지점도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좀 절실한” 두 사람의 유쾌한 수다는 퀴어-페미니즘의 흥미로운 결합지점을 보여준다. 물론 소설은 다만 낙관적인 전망으로 그치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 재희의 결혼식 장면은 남성 퀴어와 여성의 상이한 생애주기에 따른 연대 (불)가능성을 더 멀리까지 탐문하고 있다.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
표제작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비규범적인 몸이 겪는 제약, 퀴어에 대한 혐오를 다른 각도에서 면밀하게 본다. HIV를 경유한 혐오 발화는 퀴어가 고통받는 이유를, 사회적 권력 관계와 시민의 성원권 문제가 아니라 몸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치환하곤 한다. HIV 혐오는 ‘불행한 퀴어’라는 표상을 만든다. 차별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퀴어의 몸이 원래 불행한 것처럼 인과를 전도하는 것이다. 타인의 존재를 불행의 원인으로 고정시키고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 존재 자체를 부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 정치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HIV 담론을, 혐오세력의 병리화로부터 선취해 삶의 감각을 부여한다.

군 복무 중 휴가 때 (당시의) 남자친구에게 감염되어 PL이 된 ‘나’는 순식간에 강제 전역을 비롯한 사회적 배제를 겪게 된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장 먼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인 “독창적 별명 짓기”를 한다. HIV를 ‘카일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카일리 미노그를 듣다 꼬여버린 인생이라 카일리라고 지은 건 아니고, 그냥 이름이 예뻐서. 어차피 이것이랑 죽을 때까지 함께해야 할 판인데 나 듣기에 제일 예쁜 이름을 붙여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카일리.”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이 예쁜 이름은, 자기연민과 자기혐오를 넘는 최소이자 최대의 용기다. 인생이 꼬여버린 순간의 공포와 배제에 집착하지 않고, 타인의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이 되길 거부하고, HIV와 함께 살아가는 ‘나’의 에너지와 스스로 만들어 갈 생애에 집중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전유는 이성애 중심적인 일상의 시공간에 다른 순간을 불러들이는 퀴어의 언어적, 문화적 전략이기도 하다. 퀴어 헤테로토피아 이태원의 네온사인은 아름답게 빛난다. 여기서 ‘나’와 게이 친구들은 “와꾸만큼은 다들 180이 넘는 장정이”면서 “소녀 한 명씩을 품”고 ‘티아라’라는 독창적인 별명을 빌려 이성애적 젠더 역할/규범으로부터 벗어난 스스로를 재현/체현한다. 주중의 노동 시간에는 특정한 남성성에 대한 일관된 명령에 복종해야 했지만, 주말에는 그 강압이 일시적이나마 무너지고 자신의 몸을 더 유동적인 즐거움과 감응하게 한다.



퀴어 '지리학'의 확장
퀴어 공동체 문화와 공간적 특성에 대한 이러한 기술은 여러 퀴어 독자에게는 익숙한 동시대 문화의 문학적 재인이면서, 한편으로는 공동체 내부의 즐거운 정동과 기묘하게 섞여 종종 구분되지 않던 혐오와 공포 역시 새삼스레 마주하게 한다. “애들이랑 술 마실 때, 길에 보균자라고 소문난 애가 지나가면 개그 담당인” 친구가 이를 소재로 농담하고 다 같이 “실컷 웃다가 아 맞다, 내 몸에도 그게 있구나, 생각이 들면 그제야 등골이 서늘해지고 빳빳해”진다고 고백한다. 혐오 받는 하위 공동체 내부에서도 공포와 배제가 중첩되어 유통되는 감정 경제의 날카로운 단면이 노출되는 것이다.

퀴어의 존재를 상상하지 않고 상시적인 배제까지 일어나는 “무덤과도 같은 이곳” 서울이 “어울리지 않아”서 생겨나는 “매 순간 내 일상을 휘감는 이질감”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단 하나 있다. 규호. 카일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도 성실하게 곁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라고 말해주는 규호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규호는 매일 똑같은 ‘나’의 서울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꿔준다. 그래서 “이상하게 그가 나의 서울인 것만 같다.” 규호는 무기력한 ‘나’를 이끌고 나가 서울 곳곳의 데이트 명소에 퀴어의 사랑을 기입하고 대도시의 획일적인 질서를 조금씩 바꾸어간다.

풋풋한 시기를 거쳐, 약간의 권태기를 겪다가 동거를 하기도 하는 연인의 서사를 따라가던 ‘나’와 규호를 가로막는 것은 다시 혐오다. 취업 관문을 넘어도 신체검사에서 자신의 동의 없는 혈액 검사가 포함될까 봐 걱정해야 하고, 두 사람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넘으려 할 때도 혈액 검사는 발목을 잡는다.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규호지만, ‘나’는 그와 함께하면 삶의 경로마다 방해가 될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다.

그걸 “왜 웃으면서 말해. 슬프게”라면서 본인이 먼저 우는 규호는 ‘나’ 자신의 자기혐오를 모아 되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포장하지 않고 한없이 진실에 가깝게, 정말로 투명하게 치부까지 다 드러내는 사람은 규호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규호를 붙잡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말하지 못한다. 혹시라도 자신이 규호의 미래를 막는 것은 아닐까 싶어 규호를 먼저 밀어내는 ‘나’의 두려움과 그것이 못내 서운한 규호의 마음 사이에서, <대도시의 사랑법>은 애틋한 연애 소설이 된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를 윤리적 시혜의 대상으로만 가까스로 재현하거나, 진중한 저항 운동의 필요성을 환기하던 비극적이고 비장한 재현 관습에서 벗어나 있다. 혐오와 더불어 살면서도 굴하지 않고 웃고 울고 헤어지고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우리 시대 퀴어 청년의 목소리로 전하는 일상 이야기다.

김건형/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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