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대중의 속성 폭로한 우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입력 2021.06.13 (21:21) 수정 2021.06.13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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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생존작가들의 소설 50편을 선정해 매주 한 편씩 소개해드리는 시간, 오늘(13일) 만나볼 작품은 이문열의 중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입니다.

한국 현대사를 시골의 한 초등학교 교실 속에 응축한 우화 형식의 소설이죠.

아직 읽지 않은 분들도 제목은 한 번쯤 들어봤을법한 유명한 작품이지만, 작가의 설명을 들어보면 친숙한 내용 가운데 그동안 잘못 알았구나 싶은 대목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작가를 만나고 왔습니다.

[리포트]

이승만 정권 말기, 시골의 한 초등학교 5학년 교실.

서울에서 전학 온 한병태는 급장 엄석대의 막강한 권력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마치 선생님처럼 친구들 위에 군림하지만,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고, 친구들은 오히려 엄석대에 맞서는 한병태를 탄압합니다.

하지만 엄석대의 권력을 용납하지 않는 새 담임 선생님이 오자, 반 친구들은 태도를 180도 바꿔 엄석대의 비행을 앞다퉈 고발합니다.

소설이 발표된 시기는 1987년, 마흔 살이던 작가 이문열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거부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불현듯 집필을 시작해 불과 20여 일 만에 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이문열/소설가 : "제5공화국이란 것에 대해서 견해를 표명하거나 찬반을 할 겨를이 없이 지나가버렸어요. 나는 이 7년 동안 한마디도 안하고 지나갔는데, 이건 좀 문제가 있다 이제,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엄석대를 통해 군사독재의 폭압을 풍자하면서도, 독재에 굴종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일반 대중의 속성도 함께 폭로했습니다.

["어떤 사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자기가 아무리 악하든 잘났든 혼자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받들어주는 사회적 상황이나 구조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엄석대를 단번에 제압한 새 담임 선생님은 반 전체를 향해 일갈합니다.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 만들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고. 하지만 정의롭게만 보이는 이 선생님 역시 작가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없고 자기도 한 적 없으면서. 단지 굴종했다는 것, 혹은 충성했다는 것, 이거 갖고 그렇게 모질게 때릴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한병태가 범죄자로 전락한 엄석대를 우연히 목격하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지만, 집필 당시 작가는 엄석대가 출세해서 나타난다는 또 다른 결말을 놓고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나도 고심을 많이 했는데 3가지 결말을 갖고. 악당은 수갑 차라!"]

전학생과 기존 학생들의 갈등이란 친숙한 설정으로 오랜 시간 대중에게 사랑받았고, 미국과 유럽 등 해외 평단에서도 꾸준히 화제를 모았습니다.

[홍용희/문학평론가 : "하염없는 소시민적 속성이 부당한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고 지탱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현재형의 의미가 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문열은 특유의 보수 성향과 작가로서는 이례적인 현실정치 참여로 논란의 중심에 서 왔지만, 그럼에도 오로지 문학에 헌신한 삶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합니다.

[이문열/소설가 : "(어떤 작가로 각인되고 기억되길 바라십니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를 바라는데 가끔씩은 약하고 내 자신도 비정상적일 때가 있어서. 이제 와서 보니 나에게도 낭비의 죄가 하나 추가될지 모르겠습니다."]

KBS 뉴스 정연욱입니다.

촬영기자:조승연 유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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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력과 대중의 속성 폭로한 우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입력 2021-06-13 21:21:19
    • 수정2021-06-13 21:51:16
    뉴스 9
[앵커]

생존작가들의 소설 50편을 선정해 매주 한 편씩 소개해드리는 시간, 오늘(13일) 만나볼 작품은 이문열의 중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입니다.

한국 현대사를 시골의 한 초등학교 교실 속에 응축한 우화 형식의 소설이죠.

아직 읽지 않은 분들도 제목은 한 번쯤 들어봤을법한 유명한 작품이지만, 작가의 설명을 들어보면 친숙한 내용 가운데 그동안 잘못 알았구나 싶은 대목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작가를 만나고 왔습니다.

[리포트]

이승만 정권 말기, 시골의 한 초등학교 5학년 교실.

서울에서 전학 온 한병태는 급장 엄석대의 막강한 권력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마치 선생님처럼 친구들 위에 군림하지만,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고, 친구들은 오히려 엄석대에 맞서는 한병태를 탄압합니다.

하지만 엄석대의 권력을 용납하지 않는 새 담임 선생님이 오자, 반 친구들은 태도를 180도 바꿔 엄석대의 비행을 앞다퉈 고발합니다.

소설이 발표된 시기는 1987년, 마흔 살이던 작가 이문열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거부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불현듯 집필을 시작해 불과 20여 일 만에 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이문열/소설가 : "제5공화국이란 것에 대해서 견해를 표명하거나 찬반을 할 겨를이 없이 지나가버렸어요. 나는 이 7년 동안 한마디도 안하고 지나갔는데, 이건 좀 문제가 있다 이제,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엄석대를 통해 군사독재의 폭압을 풍자하면서도, 독재에 굴종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일반 대중의 속성도 함께 폭로했습니다.

["어떤 사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자기가 아무리 악하든 잘났든 혼자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받들어주는 사회적 상황이나 구조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엄석대를 단번에 제압한 새 담임 선생님은 반 전체를 향해 일갈합니다.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 만들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고. 하지만 정의롭게만 보이는 이 선생님 역시 작가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없고 자기도 한 적 없으면서. 단지 굴종했다는 것, 혹은 충성했다는 것, 이거 갖고 그렇게 모질게 때릴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한병태가 범죄자로 전락한 엄석대를 우연히 목격하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지만, 집필 당시 작가는 엄석대가 출세해서 나타난다는 또 다른 결말을 놓고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나도 고심을 많이 했는데 3가지 결말을 갖고. 악당은 수갑 차라!"]

전학생과 기존 학생들의 갈등이란 친숙한 설정으로 오랜 시간 대중에게 사랑받았고, 미국과 유럽 등 해외 평단에서도 꾸준히 화제를 모았습니다.

[홍용희/문학평론가 : "하염없는 소시민적 속성이 부당한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고 지탱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현재형의 의미가 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문열은 특유의 보수 성향과 작가로서는 이례적인 현실정치 참여로 논란의 중심에 서 왔지만, 그럼에도 오로지 문학에 헌신한 삶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합니다.

[이문열/소설가 : "(어떤 작가로 각인되고 기억되길 바라십니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를 바라는데 가끔씩은 약하고 내 자신도 비정상적일 때가 있어서. 이제 와서 보니 나에게도 낭비의 죄가 하나 추가될지 모르겠습니다."]

KBS 뉴스 정연욱입니다.

촬영기자:조승연 유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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