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풍경소리’ 구효서 작가 “언어에 복종하는 것이 ‘산문정신’”

입력 2021.10.24 (21:31) 수정 2021.10.24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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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소설가

Q. <풍경소리>를 쓰게 된 계기는?

'성불사'라는 노래 있잖아요. 이 소설의 보면 처음에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로 시작해요. 중간에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끝에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홀로 울게 하여라, 진한 글씨로 되어 있잖아요. 그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야 이 노래가 이게 대단한 노래 아닌가 이런 생각을 문득 했어요. 요거 써야지. 원래 작품 제목을 '성불사' 이럴까 하다가 '풍경소리'로 했던 거는 생각이 조금 더 깊어지면서 이왕 쓸 거 소리만 쓰지 말고 맛, 또 촉감, 또 뭐랄까 후각 이렇게 해서 오감에 대해서 쓰자, 이래서 '풍경소리'라 이렇게 소리에 방점을 둔 그런 제목을 쓰게 됐죠.

Q. 소설에서 '소리'가 갖는 비중이 큰데?

소리는 받아 적을 수 없잖아요. 근데 실제로 우리는 받아 적잖아요. 그랬을 때 받아 적는 글씨와 실제 소리와의 차이라는 건 엄청나고, 결국 좁혀지지 않는 차이다 라고 보는데, 실제로 우리가 듣는 소리마저도 우리 귀가 감당해낼 수 있고 가청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듣잖아요, 소리를. 그러나 그 소리가 뭐랄까 사실은 제한된 소리라고 보는 거죠. 실제로 소리는 얼마나 큰가.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엄청나게 큰 소리들이 있는데 그걸 못 듣는 거잖아요. 그래놓고 땡강땡강은 듣는 거잖아요. 아주 작은 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이 그 소리의 전부겠거니 생각하잖아요. 그리고 그거를 우리는 '띵강띵강'이라고 적어요. 그러니까 이미 큰 소리를 제한돼서 한번 듣고, 그다음에는 그 제한된 소리를 한 번 더 문자나 언어로 한번 더 제한시키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소리에 세계에서 살아서 얼마나 제한된 세계 속에서 사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모든 걸 다 보고 듣고 안다고 생각하면 살잖아요. 그래서 슥삭슥삭 이런 것도 사실 의태어든 의성어든 어떤 소리도 본래의 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이고, 우리는 그 소리를 진짜고 전부인 양 착각하고 살아간다, 그런 의미가 그 많은, 어떻게 보면 쓸데없이 많은 의성어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되죠.

Q. 주인공의 '글쓰기'는 치유의 길?

미와는 글을 씀으로 해서 치유된다거나 그러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글을 쓴다는 게 뭐지? 라고 끝없이 자문하는 것. 미와가 이 절에 와가지고, 성불사에 와가지고 글도 쓰지만, 그가 이제 절의 구성원들을 관찰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잖아요. 그러면서 끝없이 놀라고, 끝없이 자기 생각이 뒤집어지거나 아니면 굉장히 낯설어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놀라거나 이런 과정을 계속 겪으면서 글쓰기가 약간의 뒤죽박죽이 되기도 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 이렇게 써도 될까, 아니면 왜 저렇게 말하지, 끝없는 의문을 던져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치유의 과정이라는 것이 어떤 확신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 확신이 얼마나 부정확하고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알아가는 것, 그쪽이 오히려 치유로 열리는 길이지 내가 갖고 있는 어떤 내 존재에 대해서든가 아니면 내가 바라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어떤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더 병들어가는 쪽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이제 불교, 절이라는 공간, 불교는 의심의 종교거든요. 끝까지 의심하는 거거든요. 그리고 끝까지 믿지 않는 거거든요. 그런 것을 미와는 자기도 모르게 수행해 나가고 있잖아요. 글쓰기도 그 중의 하나죠.

Q. <풍경소리>는 작가님께 어떤 작품?

제가 이 소설을 몇 살에 썼는가 최고령 수상자였거든요. 환갑. 환갑이에요. 환갑이 뭔가. 진짜 내 환갑에 맞는 소설인 것 같은 거죠. 환갑은 한 생애를 정리 정산 결산하는 그런 시점이잖아요. (중간정산하는 시점?) 요즘은 중간정산이지만, 예전에는 정산이었어요. 그런 그런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나의 세계관, 나의 언어에 대한 어떤 나의 언어관 또는 아까 말했듯이 나의 어떤 감각론, 소설의 방법론,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나도 모르게 집약돼 있는 거 아닌가. 그러면서 나는 또 이제 이렇게 환갑이라면 갑으로 다시 돌아오는, 한번 원을 그려 왔잖아요. 새롭게 한 살이 된다 그러잖아요. 어떤 다른 작품을 써야 되는데 어떻게 보면 지난 육십 년은 아니지만 데뷔해서 삼십여년 동안 내가 써온 소설의 일종의 집대성 아닌가. 집약 아닌가. 모든 요소가 다 들어간. 그래서 제가 제가 봐도 좀 어려워보이기도 하는 거예요. 어쩌면 이렇게 다, 이를테면 그런 엑기스들을 뽑아서 다 꼽아 놨을까, 신기하다, 이럴 정도의 작품인 거예요. 그래서 마무리 잘했다. 그리고 이제 환갑 지나서 한 살 됐으니까 새로 한 살짜리처럼 새롭게 써봐야지. 그리고 이제 장편을 시작했죠.

Q. '산문정신'이란?

대개 사람들은 보통 언어는 인간이 만들었고 인간이 부리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실은 현대 인문학 특히 현대 정신분석학에서도 얘기했듯이 우리는 언어의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거죠. 지배를. 그래서 언어가 사람을 부립니다, 거꾸로. 그렇게 말하면 내가 쓰는 것은 내 글일까. 내 손을 통해서 나오는 내 문장이 결국 나의 고유의 문장일까. 언젠가 나에게 들어와서 내 안에 주인으로 차지하고 있는 언어가 말하자면 도발하는 거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무서워져요. 무서워진다고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겸허해져야지. 까불지 말아야지, 글을 대할 때 항상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글이 내 안에서 나오겠다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화장실을 가고, 어떻게 여행을 가고, 어떻게 술을 마시고, 어떻게 친구를 만나요. 당신이 지금 나오겠다는데. 기다려야죠. 언제 나올지도 모르고, 항상 대기하고. 작가는 언어라는 것이 숙주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복종하는 것이 작가의 태도고 정신이 아닌가, 그것이 산문정신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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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0-24 21:31:02
    • 수정2021-10-24 22: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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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소설가

Q. <풍경소리>를 쓰게 된 계기는?

'성불사'라는 노래 있잖아요. 이 소설의 보면 처음에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로 시작해요. 중간에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끝에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홀로 울게 하여라, 진한 글씨로 되어 있잖아요. 그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야 이 노래가 이게 대단한 노래 아닌가 이런 생각을 문득 했어요. 요거 써야지. 원래 작품 제목을 '성불사' 이럴까 하다가 '풍경소리'로 했던 거는 생각이 조금 더 깊어지면서 이왕 쓸 거 소리만 쓰지 말고 맛, 또 촉감, 또 뭐랄까 후각 이렇게 해서 오감에 대해서 쓰자, 이래서 '풍경소리'라 이렇게 소리에 방점을 둔 그런 제목을 쓰게 됐죠.

Q. 소설에서 '소리'가 갖는 비중이 큰데?

소리는 받아 적을 수 없잖아요. 근데 실제로 우리는 받아 적잖아요. 그랬을 때 받아 적는 글씨와 실제 소리와의 차이라는 건 엄청나고, 결국 좁혀지지 않는 차이다 라고 보는데, 실제로 우리가 듣는 소리마저도 우리 귀가 감당해낼 수 있고 가청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듣잖아요, 소리를. 그러나 그 소리가 뭐랄까 사실은 제한된 소리라고 보는 거죠. 실제로 소리는 얼마나 큰가.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엄청나게 큰 소리들이 있는데 그걸 못 듣는 거잖아요. 그래놓고 땡강땡강은 듣는 거잖아요. 아주 작은 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이 그 소리의 전부겠거니 생각하잖아요. 그리고 그거를 우리는 '띵강띵강'이라고 적어요. 그러니까 이미 큰 소리를 제한돼서 한번 듣고, 그다음에는 그 제한된 소리를 한 번 더 문자나 언어로 한번 더 제한시키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소리에 세계에서 살아서 얼마나 제한된 세계 속에서 사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모든 걸 다 보고 듣고 안다고 생각하면 살잖아요. 그래서 슥삭슥삭 이런 것도 사실 의태어든 의성어든 어떤 소리도 본래의 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이고, 우리는 그 소리를 진짜고 전부인 양 착각하고 살아간다, 그런 의미가 그 많은, 어떻게 보면 쓸데없이 많은 의성어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되죠.

Q. 주인공의 '글쓰기'는 치유의 길?

미와는 글을 씀으로 해서 치유된다거나 그러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글을 쓴다는 게 뭐지? 라고 끝없이 자문하는 것. 미와가 이 절에 와가지고, 성불사에 와가지고 글도 쓰지만, 그가 이제 절의 구성원들을 관찰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잖아요. 그러면서 끝없이 놀라고, 끝없이 자기 생각이 뒤집어지거나 아니면 굉장히 낯설어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놀라거나 이런 과정을 계속 겪으면서 글쓰기가 약간의 뒤죽박죽이 되기도 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 이렇게 써도 될까, 아니면 왜 저렇게 말하지, 끝없는 의문을 던져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치유의 과정이라는 것이 어떤 확신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 확신이 얼마나 부정확하고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알아가는 것, 그쪽이 오히려 치유로 열리는 길이지 내가 갖고 있는 어떤 내 존재에 대해서든가 아니면 내가 바라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어떤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더 병들어가는 쪽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이제 불교, 절이라는 공간, 불교는 의심의 종교거든요. 끝까지 의심하는 거거든요. 그리고 끝까지 믿지 않는 거거든요. 그런 것을 미와는 자기도 모르게 수행해 나가고 있잖아요. 글쓰기도 그 중의 하나죠.

Q. <풍경소리>는 작가님께 어떤 작품?

제가 이 소설을 몇 살에 썼는가 최고령 수상자였거든요. 환갑. 환갑이에요. 환갑이 뭔가. 진짜 내 환갑에 맞는 소설인 것 같은 거죠. 환갑은 한 생애를 정리 정산 결산하는 그런 시점이잖아요. (중간정산하는 시점?) 요즘은 중간정산이지만, 예전에는 정산이었어요. 그런 그런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나의 세계관, 나의 언어에 대한 어떤 나의 언어관 또는 아까 말했듯이 나의 어떤 감각론, 소설의 방법론,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나도 모르게 집약돼 있는 거 아닌가. 그러면서 나는 또 이제 이렇게 환갑이라면 갑으로 다시 돌아오는, 한번 원을 그려 왔잖아요. 새롭게 한 살이 된다 그러잖아요. 어떤 다른 작품을 써야 되는데 어떻게 보면 지난 육십 년은 아니지만 데뷔해서 삼십여년 동안 내가 써온 소설의 일종의 집대성 아닌가. 집약 아닌가. 모든 요소가 다 들어간. 그래서 제가 제가 봐도 좀 어려워보이기도 하는 거예요. 어쩌면 이렇게 다, 이를테면 그런 엑기스들을 뽑아서 다 꼽아 놨을까, 신기하다, 이럴 정도의 작품인 거예요. 그래서 마무리 잘했다. 그리고 이제 환갑 지나서 한 살 됐으니까 새로 한 살짜리처럼 새롭게 써봐야지. 그리고 이제 장편을 시작했죠.

Q. '산문정신'이란?

대개 사람들은 보통 언어는 인간이 만들었고 인간이 부리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실은 현대 인문학 특히 현대 정신분석학에서도 얘기했듯이 우리는 언어의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거죠. 지배를. 그래서 언어가 사람을 부립니다, 거꾸로. 그렇게 말하면 내가 쓰는 것은 내 글일까. 내 손을 통해서 나오는 내 문장이 결국 나의 고유의 문장일까. 언젠가 나에게 들어와서 내 안에 주인으로 차지하고 있는 언어가 말하자면 도발하는 거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무서워져요. 무서워진다고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겸허해져야지. 까불지 말아야지, 글을 대할 때 항상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글이 내 안에서 나오겠다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화장실을 가고, 어떻게 여행을 가고, 어떻게 술을 마시고, 어떻게 친구를 만나요. 당신이 지금 나오겠다는데. 기다려야죠. 언제 나올지도 모르고, 항상 대기하고. 작가는 언어라는 것이 숙주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복종하는 것이 작가의 태도고 정신이 아닌가, 그것이 산문정신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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