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시신은 어디있나요?”…78시간의 기록 [취재후]

입력 2024.06.29 (07:00) 수정 2024.06.29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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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이튿날인 25일. 무채색 양복을 입고 장례식장으로 출근했습니다. 대형 참사가 나면 늘 그랬듯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번엔 조금 달랐습니다. 23구의 시신은 화성시 장례식장 다섯 곳에 나눠져 있었는데, 어디에도 빈소는 없었습니다. 유가족은 보이지 않았고 공무원이 뜨문뜨문 있을 뿐이었습니다.

■ “곧 결혼하는 딸이었는데 ….”

같은 시각, 참사 현장인 아리셀 공장에서는 절규가 들렸습니다.

“어디 가야 되냐. 어디 가서 찾냐고….”

자녀의 시신이 어딨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유가족들이 일단 공장을 찾은 겁니다.

화재 현장을 찾은 유가족화재 현장을 찾은 유가족

중국인 채성범 씨는 TV로 소식을 접했습니다. 딸의 일터가 뉴스에 나오자 곧바로 전화했지만, 전화기는 꺼져있었습니다.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려고 장례식장과 현장을 오갔지만, 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습니다.

현장에 남은 거라곤 딸이 타던 차 하나였습니다. 차 앞에서 채 씨는 넋 나간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습니다. 일을 잘해 회사에서도 인정받는다며 자랑하던 서른아홉 딸이었습니다. 올 가을, 결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딸의 자동차 앞에 선 채성범 씨딸의 자동차 앞에 선 채성범 씨

채 씨는 경찰에게 ‘우리 딸은 목걸이를 하고 있다. 목걸이 사진만 찍어서 보여달라’ 요구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전에도 퇴근하고 집에 와서 ‘오늘 공장에서 불이 났다’고 말하더라고요. 다른 직원이 소화기를 들고 껐는데, 손에 화상을 입었다고요. 그래서 조심하라고 했어요. 근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 중국인 유가족 채성범 씨 인터뷰 중


■ “딸이 어떤 찬 곳에 있는지 모르는데, 어찌 밥을 먹나요.”

다음날인 26일, 유가족들의 임시 쉼터가 마련된 화성시청으로 출근했습니다. 유가족들이 온전히 쉴 수 있도록 취재진 등 외부인 출입이 통제된 곳이었지만, “OO아”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목소리는 벽을 뚫고 세어 나왔습니다.

스물여섯 살 딸이 어딨는지 알지 못하는 한 중국인 어머니는 아침 일찍 시청 분향소에 들렀습니다. 아직 영정조차 마련되지 못한 분향단위에 국화꽃 한 송이를 올렸습니다. 가족들을 부둥켜 안고, 한숨과 울음을 반복하며 기자의 질문에 어렵게 답을 이어갔습니다.

화성시청 분향소에 헌화하는 유가족화성시청 분향소에 헌화하는 유가족

“딸은 어떤 차디찬 공간에 누워있는지도 모르는데, 애미가 살겠다고 밥을 먹겠어요. 목구멍에 넘어가야 먹죠.”

- 중국인 유가족 인터뷰 중

지자체에 바라는 점을 묻자, “지금은 머리가 하얀데 뭘 바래겠어요. 그냥 시신만 빨리 알려달라고. 신원 찾는 데 집중해달라고. 그것뿐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장례식장은 이날도 적막했습니다. 아직 신원 확인이 안 된 시신에는 이름 대신 ‘일련번호’가 붙어있었습니다.


■ “아내의 시신을 마주하고,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사망자는 23명. 그중 18명은 외국인이었습니다. 시체가 대부분 불에 탔고, 일부 가족들은 해외에 있어 DNA 대조에도 시간이 걸린 겁니다. 신원확인이 모두 끝났다는 소식이 들린 건 참사 발생 약 78시간 만인 27일 오후 5시였습니다. 그때까지 유족들은 장례식장과 화재 현장, 시청 유가족 쉼터를 오갔습니다.

사망자의 신원이 확인된 가족들은 다시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었습니다. 중국인 박송남 씨 역시 뉴스에 나온 장례식장들을 전전하다, 신원이 확인됐다는 연락을 받고 아내가 있는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직원은 ‘누구의 시신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라며 보지 않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박 씨는 “힘들어도 보겠다”며 아내의 주검을 확인했습니다.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이 다 타서 망가진 시신. 박 씨의 하늘이 순간 무너졌습니다.

“평소에도 직원들을 감시했대요. 밥 먹으러 갔다 늦게 오는지, 퇴근을 빨리하진 않는지. 신입이 들어오면 비상구가 어디 있는지 이런 안전교육을 다 시켜줘야 되는데, 그런 얘긴 한 번도 못 들었어요.”

- 중국인 유가족 박송남 씨 인터뷰 중

아내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결혼식까지 올렸지만, 안정적인 일자리의 문은 10년이 지나도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아내는 불이 난 배터리 공장에서 일하기 전에도 자동차, 마스크팩, 정수기 공장 등을 계약직으로 전전했습니다.

‘일이 힘들어서 그만 둔 건가? 묻자, “힘든 게 아니고, 일손이 모자랄 땐 용역 업체에서 광고를 엄청 때려요. 그러다 회사 일감이 떨어지면 바로 자르죠. 한국인이 아니면 정규직은 안 시켜줘요.”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참사 이튿날, 시신이 모셔진 장례식장. 부검을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옮겨지는 차량에 주검이 차례로 올랐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는 ’우리 아이들에게 아빠 마지막 모습 보여줘야 하는데, 누구 마음대로 국과수에 보내냐‘며 항의했습니다. 유족의 요청에 국과수로 가던 차는 한 시간쯤 지나 장례식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차에서 시신이 나왔고, 유족의 오열이 계속됐습니다. 가족들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멀리 취재를 하던 기자들은 함께 고개를 떨궜습니다. 차량은 다시 시신을 싣고 국과수로 떠났습니다. 부검 결과, 23명의 사인은 모두 ’질식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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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딸 시신은 어디있나요?”…78시간의 기록 [취재후]
    • 입력 2024-06-29 07:00:18
    • 수정2024-06-29 07:01:07
    취재후·사건후
사고 이튿날인 25일. 무채색 양복을 입고 장례식장으로 출근했습니다. 대형 참사가 나면 늘 그랬듯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번엔 조금 달랐습니다. 23구의 시신은 화성시 장례식장 다섯 곳에 나눠져 있었는데, 어디에도 빈소는 없었습니다. 유가족은 보이지 않았고 공무원이 뜨문뜨문 있을 뿐이었습니다.

■ “곧 결혼하는 딸이었는데 ….”

같은 시각, 참사 현장인 아리셀 공장에서는 절규가 들렸습니다.

“어디 가야 되냐. 어디 가서 찾냐고….”

자녀의 시신이 어딨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유가족들이 일단 공장을 찾은 겁니다.

화재 현장을 찾은 유가족
중국인 채성범 씨는 TV로 소식을 접했습니다. 딸의 일터가 뉴스에 나오자 곧바로 전화했지만, 전화기는 꺼져있었습니다.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려고 장례식장과 현장을 오갔지만, 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습니다.

현장에 남은 거라곤 딸이 타던 차 하나였습니다. 차 앞에서 채 씨는 넋 나간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습니다. 일을 잘해 회사에서도 인정받는다며 자랑하던 서른아홉 딸이었습니다. 올 가을, 결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딸의 자동차 앞에 선 채성범 씨
채 씨는 경찰에게 ‘우리 딸은 목걸이를 하고 있다. 목걸이 사진만 찍어서 보여달라’ 요구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전에도 퇴근하고 집에 와서 ‘오늘 공장에서 불이 났다’고 말하더라고요. 다른 직원이 소화기를 들고 껐는데, 손에 화상을 입었다고요. 그래서 조심하라고 했어요. 근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 중국인 유가족 채성범 씨 인터뷰 중


■ “딸이 어떤 찬 곳에 있는지 모르는데, 어찌 밥을 먹나요.”

다음날인 26일, 유가족들의 임시 쉼터가 마련된 화성시청으로 출근했습니다. 유가족들이 온전히 쉴 수 있도록 취재진 등 외부인 출입이 통제된 곳이었지만, “OO아”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목소리는 벽을 뚫고 세어 나왔습니다.

스물여섯 살 딸이 어딨는지 알지 못하는 한 중국인 어머니는 아침 일찍 시청 분향소에 들렀습니다. 아직 영정조차 마련되지 못한 분향단위에 국화꽃 한 송이를 올렸습니다. 가족들을 부둥켜 안고, 한숨과 울음을 반복하며 기자의 질문에 어렵게 답을 이어갔습니다.

화성시청 분향소에 헌화하는 유가족
“딸은 어떤 차디찬 공간에 누워있는지도 모르는데, 애미가 살겠다고 밥을 먹겠어요. 목구멍에 넘어가야 먹죠.”

- 중국인 유가족 인터뷰 중

지자체에 바라는 점을 묻자, “지금은 머리가 하얀데 뭘 바래겠어요. 그냥 시신만 빨리 알려달라고. 신원 찾는 데 집중해달라고. 그것뿐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장례식장은 이날도 적막했습니다. 아직 신원 확인이 안 된 시신에는 이름 대신 ‘일련번호’가 붙어있었습니다.


■ “아내의 시신을 마주하고,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사망자는 23명. 그중 18명은 외국인이었습니다. 시체가 대부분 불에 탔고, 일부 가족들은 해외에 있어 DNA 대조에도 시간이 걸린 겁니다. 신원확인이 모두 끝났다는 소식이 들린 건 참사 발생 약 78시간 만인 27일 오후 5시였습니다. 그때까지 유족들은 장례식장과 화재 현장, 시청 유가족 쉼터를 오갔습니다.

사망자의 신원이 확인된 가족들은 다시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었습니다. 중국인 박송남 씨 역시 뉴스에 나온 장례식장들을 전전하다, 신원이 확인됐다는 연락을 받고 아내가 있는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직원은 ‘누구의 시신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라며 보지 않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박 씨는 “힘들어도 보겠다”며 아내의 주검을 확인했습니다.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이 다 타서 망가진 시신. 박 씨의 하늘이 순간 무너졌습니다.

“평소에도 직원들을 감시했대요. 밥 먹으러 갔다 늦게 오는지, 퇴근을 빨리하진 않는지. 신입이 들어오면 비상구가 어디 있는지 이런 안전교육을 다 시켜줘야 되는데, 그런 얘긴 한 번도 못 들었어요.”

- 중국인 유가족 박송남 씨 인터뷰 중

아내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결혼식까지 올렸지만, 안정적인 일자리의 문은 10년이 지나도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아내는 불이 난 배터리 공장에서 일하기 전에도 자동차, 마스크팩, 정수기 공장 등을 계약직으로 전전했습니다.

‘일이 힘들어서 그만 둔 건가? 묻자, “힘든 게 아니고, 일손이 모자랄 땐 용역 업체에서 광고를 엄청 때려요. 그러다 회사 일감이 떨어지면 바로 자르죠. 한국인이 아니면 정규직은 안 시켜줘요.”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참사 이튿날, 시신이 모셔진 장례식장. 부검을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옮겨지는 차량에 주검이 차례로 올랐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는 ’우리 아이들에게 아빠 마지막 모습 보여줘야 하는데, 누구 마음대로 국과수에 보내냐‘며 항의했습니다. 유족의 요청에 국과수로 가던 차는 한 시간쯤 지나 장례식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차에서 시신이 나왔고, 유족의 오열이 계속됐습니다. 가족들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멀리 취재를 하던 기자들은 함께 고개를 떨궜습니다. 차량은 다시 시신을 싣고 국과수로 떠났습니다. 부검 결과, 23명의 사인은 모두 ’질식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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