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만에 또 충돌…‘법률 해석’ 놓고 헌재-대법 ‘신경전’

입력 2022.07.0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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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권 분립에 따른 사법부의 최고기관인 대법원,
그리고 1987년 헌법 개정과 1988년 헌법재판소법 제정으로 탄생한 헌법재판소. 두 기관은 헌법 체계상으로 동등한 '최고 법원'입니다.

하지만 두 기관 사이엔 보이지 않는 갈등이 계속돼 왔습니다. 바로 '법률 해석권' 때문인데요, 법률을 해석하는 권한이 대법원에만 있느냐, 헌재에도 있느냐를 놓고 두 '최고 법원'이 자존심 대결을 벌여 온 겁니다.

그런데 어제(30일)도 이 해묵은 갈등이 다시 한번 터졌습니다.

■ "위촉 위원도 공무원?"…헌재 '위헌 결정'에도 법원, 재심 청구 기각

사건의 발단은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A 씨는 제주도 통합영향평가심의위원회에서 '위촉'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던 도중 개발업자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9년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검찰은 위촉 심의위원인 A 씨를 '공무원' 신분으로 보고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법원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대법원은 2011년 A 씨에게 징역 2년을 확정했습니다.

하지만 A 씨는 재판 도중 "위촉 심의위원은 공무원이 아니다"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습니다.

그런데 헌재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난 뒤인 2012년 A 씨의 손을 들어준 겁니다.

헌재는 "형법상 뇌물죄의 '공무원'에 위촉 심의위원이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한 (뇌물죄 조항은) 헌법에 위반된다"며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한정위헌'이란 해당 법 조항 자체는 위헌이 아니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면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단입니다.

'최종심'인 대법원의 재판 결과를 헌재가 뒤집은 건데, 문제는 이때부터 생겨납니다.

A 씨는 헌재 결정을 근거로 2013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듬해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은 헌재의 의견에 불과해 법원이 따를 의무가 없다"며 A 씨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A 씨는 다시 한번 헌재에 판단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헌법재판소법은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는 헌법소원(재판소원)을 낼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재판소법 제68조
①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不行使)로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받은 자는 '법원의 재판을 제외하고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이에 A 씨는 재판소원을 금지하는 헌법재판소법 68조와 대법원의 재심 기각 결정이 자신의 기본권인 '재판청구권'을 침해했다며 또 한 번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습니다.

■ 헌재 "한정위헌 결정 수용 안 한 재판 취소"

A 씨가 헌법소원을 낸 지 8년 만에 헌재가 어제 결론을 내렸습니다.

헌재는 재심 청구를 수용하지 않은 대법원 결정은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을 따르지 않는 재판이라며, 이를 취소했습니다.

또, 재판소원을 금지한 헌법재판소법 68조에 대해 "헌재 위헌결정을 따르지 않은 재판에 대해선 재판소원을 허용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한정위헌 결정도 위헌 결정"이라며 법원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가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헌재가 법원의 재판을 직권 취소한 것은 1997년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법률 해석'에 있어 헌재가 대법원 위에 있다며 대법원을 상대로 전면전을 선언한 셈입니다.

다만 헌재는 뇌물수수 혐의로 A 씨의 유죄가 확정된 본안 사건에 대해서는 헌법소원심판 청구를 각하했습니다.

헌재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으로 선언하지 않은 법률이 적용된 재판을, 그 뒤에 위헌결정이 선고되었다는 이유로 헌법소원심판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밝혔습니다.

■ 침묵하는 대법원

대법원은 이런 헌재 결정에 대해 "검토 중"이라며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법원이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입니다.

대법원은 "법령의 해석·적용 권한은 대법원을 최고법원으로 하는 법원에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아 왔습니다.

헌재는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지만 결정해야 하고, 법률 해석 권한은 대법원의 몫이라는 취지입니다.

대법원의 기존 입장이 명확한 만큼, 사법부가 갑자기 입장을 바꿔 한정위헌 결정을 전면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헌재는 한정위헌 결정을 따르지 않는 재판에 대해 앞으로 헌법소원심판 청구를 허용할 방침이어서, 본래 3심으로 끝나야 할 재판이 한없이 늘어질 가능성도 생겼습니다.

백인성 법조전문기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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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년 만에 또 충돌…‘법률 해석’ 놓고 헌재-대법 ‘신경전’
    • 입력 2022-07-01 08:00:20
    취재K

삼권 분립에 따른 사법부의 최고기관인 대법원,
그리고 1987년 헌법 개정과 1988년 헌법재판소법 제정으로 탄생한 헌법재판소. 두 기관은 헌법 체계상으로 동등한 '최고 법원'입니다.

하지만 두 기관 사이엔 보이지 않는 갈등이 계속돼 왔습니다. 바로 '법률 해석권' 때문인데요, 법률을 해석하는 권한이 대법원에만 있느냐, 헌재에도 있느냐를 놓고 두 '최고 법원'이 자존심 대결을 벌여 온 겁니다.

그런데 어제(30일)도 이 해묵은 갈등이 다시 한번 터졌습니다.

■ "위촉 위원도 공무원?"…헌재 '위헌 결정'에도 법원, 재심 청구 기각

사건의 발단은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A 씨는 제주도 통합영향평가심의위원회에서 '위촉'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던 도중 개발업자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9년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검찰은 위촉 심의위원인 A 씨를 '공무원' 신분으로 보고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법원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대법원은 2011년 A 씨에게 징역 2년을 확정했습니다.

하지만 A 씨는 재판 도중 "위촉 심의위원은 공무원이 아니다"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습니다.

그런데 헌재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난 뒤인 2012년 A 씨의 손을 들어준 겁니다.

헌재는 "형법상 뇌물죄의 '공무원'에 위촉 심의위원이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한 (뇌물죄 조항은) 헌법에 위반된다"며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한정위헌'이란 해당 법 조항 자체는 위헌이 아니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면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단입니다.

'최종심'인 대법원의 재판 결과를 헌재가 뒤집은 건데, 문제는 이때부터 생겨납니다.

A 씨는 헌재 결정을 근거로 2013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듬해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은 헌재의 의견에 불과해 법원이 따를 의무가 없다"며 A 씨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A 씨는 다시 한번 헌재에 판단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헌법재판소법은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는 헌법소원(재판소원)을 낼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재판소법 제68조
①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不行使)로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받은 자는 '법원의 재판을 제외하고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이에 A 씨는 재판소원을 금지하는 헌법재판소법 68조와 대법원의 재심 기각 결정이 자신의 기본권인 '재판청구권'을 침해했다며 또 한 번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습니다.

■ 헌재 "한정위헌 결정 수용 안 한 재판 취소"

A 씨가 헌법소원을 낸 지 8년 만에 헌재가 어제 결론을 내렸습니다.

헌재는 재심 청구를 수용하지 않은 대법원 결정은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을 따르지 않는 재판이라며, 이를 취소했습니다.

또, 재판소원을 금지한 헌법재판소법 68조에 대해 "헌재 위헌결정을 따르지 않은 재판에 대해선 재판소원을 허용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한정위헌 결정도 위헌 결정"이라며 법원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가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헌재가 법원의 재판을 직권 취소한 것은 1997년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법률 해석'에 있어 헌재가 대법원 위에 있다며 대법원을 상대로 전면전을 선언한 셈입니다.

다만 헌재는 뇌물수수 혐의로 A 씨의 유죄가 확정된 본안 사건에 대해서는 헌법소원심판 청구를 각하했습니다.

헌재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으로 선언하지 않은 법률이 적용된 재판을, 그 뒤에 위헌결정이 선고되었다는 이유로 헌법소원심판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밝혔습니다.

■ 침묵하는 대법원

대법원은 이런 헌재 결정에 대해 "검토 중"이라며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법원이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입니다.

대법원은 "법령의 해석·적용 권한은 대법원을 최고법원으로 하는 법원에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아 왔습니다.

헌재는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지만 결정해야 하고, 법률 해석 권한은 대법원의 몫이라는 취지입니다.

대법원의 기존 입장이 명확한 만큼, 사법부가 갑자기 입장을 바꿔 한정위헌 결정을 전면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헌재는 한정위헌 결정을 따르지 않는 재판에 대해 앞으로 헌법소원심판 청구를 허용할 방침이어서, 본래 3심으로 끝나야 할 재판이 한없이 늘어질 가능성도 생겼습니다.

백인성 법조전문기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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