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수용시설 ‘덕성원’이 짓밟은 꿈…“지옥보다 더한 지옥이었다”

입력 2024.05.0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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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덕성원은 1949년 11월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건립됐다가 한국전쟁이 터진 이후인 1952년 1월, 부산시 동래구 중동(지금의 해운대구)으로 옮겨 문을 연 아동보육시설입니다. 덕성보육원으로 시작해 1996년 사회복지법인 덕성원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하다 2000년 폐원했습니다.

이곳에서 '형제복지원'처럼 인권 유린이 자행됐다는 주장이 최근 나오고 있습니다. KBS는 지난해 덕성원 생존 피해자인 안종환 씨를 만나 실상을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이후 인권 유린의 피해를 증언하는 사람들이 늘어 전국으로 흩어진 피해자 40여 명이 함께 만나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덕성원 피해생존자 협의회'를 구성하고 피해자 추가 발굴과 증언을 위한 공식 활동에 나섰습니다.

아동수용시설 ‘덕성원’전경아동수용시설 ‘덕성원’전경

덕성원 피해자 안종환 씨.덕성원 피해자 안종환 씨.

■ 아동수용시설 '덕성원'이 짓밟은 사람들…첫 피해 증언자 '안종환'

올해 47살인 덕성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 안종환 씨는 갓난 아기 시절 어머니 등에 업힌 채로 형제복지원에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7살 무렵 어머니와 헤어져 덕성원이라는 '아동 수용 시설'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피해자 안종환 씨의 덕성원 입소카드.피해자 안종환 씨의 덕성원 입소카드.

형제복지원에서 나오면 좀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하루 만에 그 꿈은 부서졌습니다. 덕성원에서의 삶 역시 악몽이었습니다.

12년 동안 매일 끊임없는 강제 노역의 연속이었습니다. 학교 가기 전 밭일하고, 밤에는 건물 짓고…. 일이 끝나면 끊임없는 발길질을 당했고, 머리를 땅에 박고 엎드려 뻗치기를 하는 기합도 이어졌습니다. 일상적으로 폭력에 노출됐습니다.

안 씨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 일들을 표현한다고 해도 마음으로 못 느낄 것"이라며 "지옥보다 더 겁나는 지옥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덕성원에서 나온 안 씨는 전남 순천에서 수산업을 해 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 한 달에 5백만 원씩 적금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 무렵, 덕성원의 원장이 돈을 빌려달라며 안 씨를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덕성원이 없어지게 됐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자신처럼 덕성원에서 살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거리에 나앉게 된다는 말에 마음이 약해졌다고 했습니다. 결국, 열심히 모은 돈을 건넸습니다.

장가갈 때 다시 돌려준다고 했지만, 돌아 온 건 돈이 아닌 구타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덕성원은 안 씨 이름으로 보증도 서는가 하면 신용카드도 여러 개 만들었습니다.

덕성원의 마지막 세대인 30대 피해자 공 모 씨덕성원의 마지막 세대인 30대 피해자 공 모 씨

■ 21세기에도 인권유린 자행... 30대 피해자의 눈물

덕성원의 인권유린은 폐원되기 전인 2000년까지도 계속됐다고 합니다.

1987년생인 30대 여성인 공 모 씨는 1991년 덕성원에 갔습니다. 다른 보육시설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차에 태워져 영문도 모른 채 덕성원으로 보내진 겁니다.

공 씨의 삶 역시 노역의 반복이었습니다. 매일 밤낮으로 밭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루에 깻잎을 천장씩 따지 못하면 매를 맞았다고 했습니다.

화장실 청소를 하다 벽돌에 손가락이 찢어졌지만, 치료는 없었습니다. 이후 공 씨는 두 손의 새끼손가락 길이가 달라졌습니다.

설립자의 병구완도 도맡아 했다고 합니다. 대소변을 받아 내고 목욕도 시켜야 했습니다.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학교에 갈 때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것도 막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 특별활동이 있어 탈출할 수 있었는데 원장이 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다는 겁니다.

"고아원 아이들은 토요일에 학교에 오지 않는다"는 말이 돌면서 친구를 사귈 수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학교에 안 나오냐고 묻지 않았고, 체벌로 멍든 몸을 보고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습니다.

2000년 덕성원이 폐원되면서 공 씨는 비로소 해방됐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덕성원을 잊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공 씨는 미국인과 결혼도 했습니다. 이제는 다 잊고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아직도 꿈만 꾸면 덕성원이 나와 울면서 깬다고 합니다.

덕성원 생존 피해자들덕성원 생존 피해자들

■ "잃어버린 세월, 사과받고 싶다"… 직권조사 요구

'생존자 피해협의회'를 결성한 덕성원 피해자들이 원하는 건 제대로 된 진상조사와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사과입니다.

현재 진실과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참고인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피해자들은 진상을 규명하고 숨은 피해자를 찾기 위해서는 직권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특히 덕성원에선 '아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누군가 와서 마음에 드는 아이를 데려가는' 불법 입양도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일을 규명하려면 직권조사가 꼭 이뤄져야 한다는 겁니다.

부산시 역시 '덕성원 인권침해 조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진화위에 여러 차례 공문도 보냈습니다.

진화위는 그러나, 조사할 시간과 인력이 부족해 직권조사할 여력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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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동수용시설 ‘덕성원’이 짓밟은 꿈…“지옥보다 더한 지옥이었다”
    • 입력 2024-05-02 10: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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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성원은 1949년 11월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건립됐다가 한국전쟁이 터진 이후인 1952년 1월, 부산시 동래구 중동(지금의 해운대구)으로 옮겨 문을 연 아동보육시설입니다. 덕성보육원으로 시작해 1996년 사회복지법인 덕성원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하다 2000년 폐원했습니다.<br /><br />이곳에서 '형제복지원'처럼 인권 유린이 자행됐다는 주장이 최근 나오고 있습니다. KBS는 지난해 덕성원 생존 피해자인 안종환 씨를 만나 실상을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이후 인권 유린의 피해를 증언하는 사람들이 늘어 전국으로 흩어진 피해자 40여 명이 함께 만나기도 했습니다. <br /><br />이들이 '덕성원 피해생존자 협의회'를 구성하고 피해자 추가 발굴과 증언을 위한 공식 활동에 나섰습니다.<br />
아동수용시설 ‘덕성원’전경
덕성원 피해자 안종환 씨.
■ 아동수용시설 '덕성원'이 짓밟은 사람들…첫 피해 증언자 '안종환'

올해 47살인 덕성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 안종환 씨는 갓난 아기 시절 어머니 등에 업힌 채로 형제복지원에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7살 무렵 어머니와 헤어져 덕성원이라는 '아동 수용 시설'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피해자 안종환 씨의 덕성원 입소카드.
형제복지원에서 나오면 좀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하루 만에 그 꿈은 부서졌습니다. 덕성원에서의 삶 역시 악몽이었습니다.

12년 동안 매일 끊임없는 강제 노역의 연속이었습니다. 학교 가기 전 밭일하고, 밤에는 건물 짓고…. 일이 끝나면 끊임없는 발길질을 당했고, 머리를 땅에 박고 엎드려 뻗치기를 하는 기합도 이어졌습니다. 일상적으로 폭력에 노출됐습니다.

안 씨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 일들을 표현한다고 해도 마음으로 못 느낄 것"이라며 "지옥보다 더 겁나는 지옥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덕성원에서 나온 안 씨는 전남 순천에서 수산업을 해 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 한 달에 5백만 원씩 적금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 무렵, 덕성원의 원장이 돈을 빌려달라며 안 씨를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덕성원이 없어지게 됐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자신처럼 덕성원에서 살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거리에 나앉게 된다는 말에 마음이 약해졌다고 했습니다. 결국, 열심히 모은 돈을 건넸습니다.

장가갈 때 다시 돌려준다고 했지만, 돌아 온 건 돈이 아닌 구타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덕성원은 안 씨 이름으로 보증도 서는가 하면 신용카드도 여러 개 만들었습니다.

덕성원의 마지막 세대인 30대 피해자 공 모 씨
■ 21세기에도 인권유린 자행... 30대 피해자의 눈물

덕성원의 인권유린은 폐원되기 전인 2000년까지도 계속됐다고 합니다.

1987년생인 30대 여성인 공 모 씨는 1991년 덕성원에 갔습니다. 다른 보육시설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차에 태워져 영문도 모른 채 덕성원으로 보내진 겁니다.

공 씨의 삶 역시 노역의 반복이었습니다. 매일 밤낮으로 밭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루에 깻잎을 천장씩 따지 못하면 매를 맞았다고 했습니다.

화장실 청소를 하다 벽돌에 손가락이 찢어졌지만, 치료는 없었습니다. 이후 공 씨는 두 손의 새끼손가락 길이가 달라졌습니다.

설립자의 병구완도 도맡아 했다고 합니다. 대소변을 받아 내고 목욕도 시켜야 했습니다.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학교에 갈 때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것도 막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 특별활동이 있어 탈출할 수 있었는데 원장이 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다는 겁니다.

"고아원 아이들은 토요일에 학교에 오지 않는다"는 말이 돌면서 친구를 사귈 수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학교에 안 나오냐고 묻지 않았고, 체벌로 멍든 몸을 보고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습니다.

2000년 덕성원이 폐원되면서 공 씨는 비로소 해방됐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덕성원을 잊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공 씨는 미국인과 결혼도 했습니다. 이제는 다 잊고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아직도 꿈만 꾸면 덕성원이 나와 울면서 깬다고 합니다.

덕성원 생존 피해자들
■ "잃어버린 세월, 사과받고 싶다"… 직권조사 요구

'생존자 피해협의회'를 결성한 덕성원 피해자들이 원하는 건 제대로 된 진상조사와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사과입니다.

현재 진실과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참고인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피해자들은 진상을 규명하고 숨은 피해자를 찾기 위해서는 직권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특히 덕성원에선 '아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누군가 와서 마음에 드는 아이를 데려가는' 불법 입양도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일을 규명하려면 직권조사가 꼭 이뤄져야 한다는 겁니다.

부산시 역시 '덕성원 인권침해 조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진화위에 여러 차례 공문도 보냈습니다.

진화위는 그러나, 조사할 시간과 인력이 부족해 직권조사할 여력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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