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갈등 사이에 다리를 놓아라”…퇴장하는 ‘무티’ 메르켈이 특별한 이유

입력 2021.09.2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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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무티’ 앙겔라 메르켈. 9월 26일 총선이 끝나면 16년 총리직을 마무리한다.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무티’ 앙겔라 메르켈. 9월 26일 총선이 끝나면 16년 총리직을 마무리한다.

총선이 치러지는 9월 26일은 독일인들에게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기민(CDU)-기사(CSU)연합의 장기 집권이 막을 내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는 사민당(SPD)으로 정권이 옮겨질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독일에 새로운 정치 지형이 탄생하게 되는 것보다 더 관심을 끄는 건 '무티(엄마)'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퇴임입니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전후 최연소 총리, 정치적 스승인 헬무트 콜 총리와 같이 재임기간이 16년으로 역대 최장수 총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이미 숱한 '대명사'로 불리는 메르켈 총리는 이번 총선을 끝으로 정치 무대 뒤편으로 물러납니다.

역대 독일 총리 중 스스로 총리직을 내려놓은 사람은 메르켈이 유일합니다.

■ 최연소 독일 총리가 된 동독 출신의 여성 과학자

잘 알려진대로 메르켈 총리는 동독 출신입니다.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지만, 생후 8주 만에 목사였던 아버지의 발령으로 가족이 함께 동독으로 이주합니다. 자란 곳은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로 메르켈은 이곳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8번 당선됩니다.

동독에서 자란 메르켈은 카를 마르크스 대학(현 라이프치히 대학) 물리학과에 진학했고, 이곳에서 양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특이한 점은 동독 사회의 엘리트로 성장하던 메르켈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동독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특히 악명높은 동독의 첩보기관 '슈타지'의 협력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만약 메르켈이 슈타지와 손을 잡았다면, 그리고 그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면 메르켈의 정치 생명은 그 순간 끝났을 겁니다. 메르켈의 강단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르켈은 통일되던 1990년 헬무트 콜 총리(재임 기간 1982.10~1998.10로 현재까지 독일 최장수 총리)가 이끌던 보수 우파 기민당(CDU)에 입당합니다. 통일 총리가 된 콜에 발탁돼 정치를 시작한 메르켈은 통일 독일의 여성청소년부 장관, 환경장관, 원자력부 장관 등을 지냈고, 2000년부터는 기민당 최초의 여성 대표에 선출됐습니다.

그리고 기민당을 이끌고 2005년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에 올라 16년간 독일을 이끌어 왔습니다.

2015년 베를린 난민센터를 방문한 메르켈 총리. 한 난민의 요청으로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2015년 베를린 난민센터를 방문한 메르켈 총리. 한 난민의 요청으로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 "갈등 사이에 다리를 놓아라"…'무티' 메르켈의 리더십

총리가 됐지만, 그 과정이 순탄한 건 아니었습니다. 2005년 총선에서 기민-기사연합이 얻은 의석은 226석. 독일 정치 체제의 특성상 과반 정당이 탄생할 수 없고 연정을 꾸려야 하지만 226석은 너무나 모자란 숫자였습니다.

여기서 메르켈의 리더십이 발휘됩니다. 222석을 얻은 중도좌파 성향의 사민당과 좌우 대연정을 구성하게 됩니다. 기민-기사연합은 2차대전 후 집권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좌파 정당과 연정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대연정'이었던 셈이죠. 그렇게 2005년 9월 18일 선거 이후 2개월 만에야 협상을 마무리 짓고 메르켈은 그해 11월 22일 독일 8대 연방 총리이자, 통일 독일의 세 번째 총리에 오릅니다.

집권 과정에서 보여줬던 리더십은, 물론 정치적 역학 관계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메르켈의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협상과 갈등의 중재라는 것이죠. 메르켈이 한 말 중 "갈등 사이에 다리를 놓아라"라는 유명한 '명언'이 있습니다. 집권 16년 동안 메르켈은 실제 독일 국내와 전 세계에서 갈등의 중재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메르켈의 재임 중 가장 큰 위기는 아무래도 2015년 난민 문제였을 것입니다. 내전 장기화로 유럽으로 몰려든 100만 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 메르켈 총리는 많은 독일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난민 수용 정책을 폈습니다. 난민 센터를 방문해 독일 국민들에게 '우리는 할 수 있다'며 확신을 주며 갈등 해소에 나섰습니다.

1,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과오에 대한 이미지 개선 차원이라든가, 고령화되는 독일 사회의 노동력 확보 차원의 난민 정책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유럽 국가 지도자 누구도 하지 못한 대단한 결단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당시 독일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루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난민들의 범죄가 일어나며 가뜩이나 난민 정책이 마뜩지 않았던 독일 극우 세력들에 의한 인종차별 범죄로 이어졌고, 2016년엔 이슬람 세력에 의한 여러 건의 테러가 발생해 독일 사회가 혼란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메르켈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손 모양 ‘메르켈의 마름모’ 또는 ‘메르켈의 다이아몬드’메르켈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손 모양 ‘메르켈의 마름모’ 또는 ‘메르켈의 다이아몬드’

■ 위기마다 발휘된 결단력…유럽의 '병자(病者)'에서 유럽의 '엔진'으로

메르켈 총리는 난민 문제 외에도 재임 기간 중 여러 번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특유의 협상력과 결단력으로 상황을 헤쳐나갔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독일도 안전지대는 아니었습니다. 메르켈은 신속하게 대국민 연설을 통해 "여러분들의 예금은 안전합니다"라고 국민들을 안심시켰고, 은행을 상대로 한 4,800억 유로의 대규모 구제금융을 편성했습니다. 독일은 금융위기 당시 국내총생산은 5.7% 감소했지만, 실업률은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2009년 그리스발 유로존 재정 위기에서 유로화를 구한 것도 메르켈이었습니다. 메르켈은 유로존 국가들을 상대로 강력한 구조개혁과 긴축정책을 실시하도록 압박을 가했습니다. 자칫 어렵게 구축한 EU가 해체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에서 메르켈은 독일뿐만 아니라 전 EU 회원국들의 뼈를 깎는 개혁을 요구했고 결국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엔 코로나19 사태입니다. 임기 말 찾아 온 최악의 위기, 하지만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와 비교하면 순탄하게 위기를 극복해왔습니다. 그 중심에는 우리나라 질병관리청에 해당하는 로베르트코흐연구소 등 의료 기관의 활약이 있었지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피해 복구에 만전을 기한 메르켈 내각의 공이 크다는 평가입니다. 특히 메르켈 총리는 과학자 출신답게 정확한 수치를 구사하며 국민들을 설득하고 코로나19 피해를 줄이는데 앞장 섰습니다.

메르켈이 총리에 오를 당시 독일은 유럽의 '병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통일 이후 들어간 막대한 통일 비용, 이로 인한 경제 침체와 10%를 훌쩍 넘긴 실업률로 라인강의 기적은 옛말처럼 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또한, 구동독 지역과 서독 지역의 경제 차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도 독일 사회의 위험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메르켈 집권 16년이 지난 지금, 독일이 실업률은 3%대에 불과하며 안정적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유럽 연합의 지도국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메르켈의 16년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평가는 80%에 가까운 현재 그의 지지율이 답해줍니다.

이제 다음 주면 독일을 이끌 새 총리가 나올겁니다. 하지만 누가 총리가 되든 당분간은 메르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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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갈등 사이에 다리를 놓아라”…퇴장하는 ‘무티’ 메르켈이 특별한 이유
    • 입력 2021-09-20 09:30:03
    특파원 리포트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무티’ 앙겔라 메르켈. 9월 26일 총선이 끝나면 16년 총리직을 마무리한다.
총선이 치러지는 9월 26일은 독일인들에게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기민(CDU)-기사(CSU)연합의 장기 집권이 막을 내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는 사민당(SPD)으로 정권이 옮겨질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독일에 새로운 정치 지형이 탄생하게 되는 것보다 더 관심을 끄는 건 '무티(엄마)'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퇴임입니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전후 최연소 총리, 정치적 스승인 헬무트 콜 총리와 같이 재임기간이 16년으로 역대 최장수 총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이미 숱한 '대명사'로 불리는 메르켈 총리는 이번 총선을 끝으로 정치 무대 뒤편으로 물러납니다.

역대 독일 총리 중 스스로 총리직을 내려놓은 사람은 메르켈이 유일합니다.

■ 최연소 독일 총리가 된 동독 출신의 여성 과학자

잘 알려진대로 메르켈 총리는 동독 출신입니다.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지만, 생후 8주 만에 목사였던 아버지의 발령으로 가족이 함께 동독으로 이주합니다. 자란 곳은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로 메르켈은 이곳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8번 당선됩니다.

동독에서 자란 메르켈은 카를 마르크스 대학(현 라이프치히 대학) 물리학과에 진학했고, 이곳에서 양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특이한 점은 동독 사회의 엘리트로 성장하던 메르켈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동독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특히 악명높은 동독의 첩보기관 '슈타지'의 협력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만약 메르켈이 슈타지와 손을 잡았다면, 그리고 그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면 메르켈의 정치 생명은 그 순간 끝났을 겁니다. 메르켈의 강단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르켈은 통일되던 1990년 헬무트 콜 총리(재임 기간 1982.10~1998.10로 현재까지 독일 최장수 총리)가 이끌던 보수 우파 기민당(CDU)에 입당합니다. 통일 총리가 된 콜에 발탁돼 정치를 시작한 메르켈은 통일 독일의 여성청소년부 장관, 환경장관, 원자력부 장관 등을 지냈고, 2000년부터는 기민당 최초의 여성 대표에 선출됐습니다.

그리고 기민당을 이끌고 2005년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에 올라 16년간 독일을 이끌어 왔습니다.

2015년 베를린 난민센터를 방문한 메르켈 총리. 한 난민의 요청으로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 "갈등 사이에 다리를 놓아라"…'무티' 메르켈의 리더십

총리가 됐지만, 그 과정이 순탄한 건 아니었습니다. 2005년 총선에서 기민-기사연합이 얻은 의석은 226석. 독일 정치 체제의 특성상 과반 정당이 탄생할 수 없고 연정을 꾸려야 하지만 226석은 너무나 모자란 숫자였습니다.

여기서 메르켈의 리더십이 발휘됩니다. 222석을 얻은 중도좌파 성향의 사민당과 좌우 대연정을 구성하게 됩니다. 기민-기사연합은 2차대전 후 집권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좌파 정당과 연정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대연정'이었던 셈이죠. 그렇게 2005년 9월 18일 선거 이후 2개월 만에야 협상을 마무리 짓고 메르켈은 그해 11월 22일 독일 8대 연방 총리이자, 통일 독일의 세 번째 총리에 오릅니다.

집권 과정에서 보여줬던 리더십은, 물론 정치적 역학 관계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메르켈의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협상과 갈등의 중재라는 것이죠. 메르켈이 한 말 중 "갈등 사이에 다리를 놓아라"라는 유명한 '명언'이 있습니다. 집권 16년 동안 메르켈은 실제 독일 국내와 전 세계에서 갈등의 중재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메르켈의 재임 중 가장 큰 위기는 아무래도 2015년 난민 문제였을 것입니다. 내전 장기화로 유럽으로 몰려든 100만 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 메르켈 총리는 많은 독일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난민 수용 정책을 폈습니다. 난민 센터를 방문해 독일 국민들에게 '우리는 할 수 있다'며 확신을 주며 갈등 해소에 나섰습니다.

1,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과오에 대한 이미지 개선 차원이라든가, 고령화되는 독일 사회의 노동력 확보 차원의 난민 정책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유럽 국가 지도자 누구도 하지 못한 대단한 결단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당시 독일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루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난민들의 범죄가 일어나며 가뜩이나 난민 정책이 마뜩지 않았던 독일 극우 세력들에 의한 인종차별 범죄로 이어졌고, 2016년엔 이슬람 세력에 의한 여러 건의 테러가 발생해 독일 사회가 혼란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메르켈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손 모양 ‘메르켈의 마름모’ 또는 ‘메르켈의 다이아몬드’
■ 위기마다 발휘된 결단력…유럽의 '병자(病者)'에서 유럽의 '엔진'으로

메르켈 총리는 난민 문제 외에도 재임 기간 중 여러 번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특유의 협상력과 결단력으로 상황을 헤쳐나갔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독일도 안전지대는 아니었습니다. 메르켈은 신속하게 대국민 연설을 통해 "여러분들의 예금은 안전합니다"라고 국민들을 안심시켰고, 은행을 상대로 한 4,800억 유로의 대규모 구제금융을 편성했습니다. 독일은 금융위기 당시 국내총생산은 5.7% 감소했지만, 실업률은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2009년 그리스발 유로존 재정 위기에서 유로화를 구한 것도 메르켈이었습니다. 메르켈은 유로존 국가들을 상대로 강력한 구조개혁과 긴축정책을 실시하도록 압박을 가했습니다. 자칫 어렵게 구축한 EU가 해체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에서 메르켈은 독일뿐만 아니라 전 EU 회원국들의 뼈를 깎는 개혁을 요구했고 결국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엔 코로나19 사태입니다. 임기 말 찾아 온 최악의 위기, 하지만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와 비교하면 순탄하게 위기를 극복해왔습니다. 그 중심에는 우리나라 질병관리청에 해당하는 로베르트코흐연구소 등 의료 기관의 활약이 있었지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피해 복구에 만전을 기한 메르켈 내각의 공이 크다는 평가입니다. 특히 메르켈 총리는 과학자 출신답게 정확한 수치를 구사하며 국민들을 설득하고 코로나19 피해를 줄이는데 앞장 섰습니다.

메르켈이 총리에 오를 당시 독일은 유럽의 '병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통일 이후 들어간 막대한 통일 비용, 이로 인한 경제 침체와 10%를 훌쩍 넘긴 실업률로 라인강의 기적은 옛말처럼 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또한, 구동독 지역과 서독 지역의 경제 차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도 독일 사회의 위험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메르켈 집권 16년이 지난 지금, 독일이 실업률은 3%대에 불과하며 안정적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유럽 연합의 지도국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메르켈의 16년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평가는 80%에 가까운 현재 그의 지지율이 답해줍니다.

이제 다음 주면 독일을 이끌 새 총리가 나올겁니다. 하지만 누가 총리가 되든 당분간은 메르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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