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피의사실공표·여론몰이의 피해자…‘25년 판사’ 유해용의 최후진술

입력 2019.12.16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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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에 앞서서 최초 변론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 저의 진술 내용이 공판조서에 제대로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검찰이 '사법농단' 의혹 수사를 거쳐 재판에 넘긴 전·현직 법관은 모두 14명. 그 가운데 처음으로 오늘(16일) 한 전직 법관의 1심 재판이 약 7개월 만에 마무리됐습니다. 사법연수원 교수와 대법원 선임·수석재판연구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지내고 지난해 2월 퇴임한 유해용 전 판사(사법연수원 19기·現 유해용법률사무소 변호사)가 그 주인공입니다.

검찰은 지난해 9월 이후 유해용 변호사의 사무실을 두 차례 압수수색했다.검찰은 지난해 9월 이후 유해용 변호사의 사무실을 두 차례 압수수색했다.

유해용 변호사는 2016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으로 재직하면서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의 지시를 받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박채윤 씨의 특허소송 상고심과 관련해 사건의 진행경과와 처리계획 등을 정리한 '사안요약' 문건을 모 재판연구관에게 작성하게 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해당 문건을 임 전 차장을 통해 청와대로 전달한 혐의(공무상비밀누설)를 받습니다. 다만 검찰은 오늘 결심공판에 이르러, 이 문건을 요구하고 전달받은 당사자를 청와대가 아닌 "사법부 외부의 성명불상자"로 바꾼 뒤 같은 내용의 혐의를 예비적 공소사실로 추가했습니다.

유 변호사는 또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대법원 선임·수석재판연구관으로 재직하면서 입수한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의 전자문서파일을 정당한 권한없이 절취, 반출해 변호사 영업에 활용한 혐의(절도,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도 받습니다.

이 같은 공소사실에 대해 유 변호사 측은 시종일관 전부 부인해 왔습니다.

그는 우선 자신이 '사안요약' 문건 작성을 재판연구관에게 지시했는지, 그 문건을 받아 임종헌 전 차장에게 전달했는지, 해당 문건이 청와대에 전달했는지가 증명되지 않았다며 검찰이 주장하는 사실관계부터 부정하고 있습니다. 또 재판연구관의 지위나 사안요약 문건의 성격을 따져볼 때 법리적으로도 직권남용이나 공무상비밀누설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 반출과 관련해서도 대법원 재직 당시 총괄재판연구관이 취합해 준 검토보고서를 저장한 것일 뿐 의식적으로 수집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오랜 업무 스타일에 따라 종전 근무지에서 사용했던 파일들을 가지고 나와 변호사 사무실 PC에 옮겨둔 것일 뿐이고, 이를 변호사 영업에 활용하려는 목적도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검찰이 이 범죄 혐의의 증거로 든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 목록 등은 위법수집증거에 해당한다며, 공소를 기각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유 변호사는 또 이 사건 재판 과정에서 "현행 피의자신문 제도와 그 결과물인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한 광범위한 증거능력 인정은 피고인의 방어권을 결정적으로 제약하고 있고, 헌법이 보장하는 진술거부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형사소송법 200조와 312조 1항, 2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습니다.

유해용 변호사가 헌법소원심판청구를 하면서 기자들에게 배포한 참고자료의 일부.유해용 변호사가 헌법소원심판청구를 하면서 기자들에게 배포한 참고자료의 일부.

검찰은 오늘 결심공판에서 유 변호사가 "대법원 재판의 공정성과 그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심각히 훼손"했고, "압수수색 과정에서 중요한 증거인 검토보고서 등을 수차례에 걸쳐 삭제, 파기하는 등 인멸하고 검찰에서의 진술을 만연히 번복하는 등 범행 일체를 부인하며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지 않다"며 징역 1년 6월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습니다.

오늘 재판의 마지막 순서로 피고인인 유 변호사에게 재판부 앞에서 최후 진술의 기회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조서에 제대로 기록해달라고 특별히 요청하기도 했는데, 7분 동안의 발언 내용을 여기에도 기록해 둡니다. (최대한 빠짐없이 받아 치려 노력했지만 현실적 여건의 한계로 일부 놓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골치 아프고 부담스러운 사건을 충실하고 공정하게 심리해주시고 피고인 측에도 공평한 기회를 주신 재판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의례적 인사는 아니고 진심으로 드리는 감사의 말씀입니다. [재판부에 인사]

어느 책에서 '인생 최대의 비극은 관점의 차이'라고 쓰여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만, 처음 수사 때부터 재판 때까지 검사님들과 피고인 사이의 그런 불신과 깊은 간격이 놓여 있는 데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서로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달라 당연한 얘기일 거 같습니다. 다만 제 입장에서는 오늘 검사님들의 의견 진술 내용 중에서, 객관적인 자료나 또 진술 내용 등에 검찰 측에 유리한 일부만 인용하신 부분이 많아서 저희들이 그동안 제출했던 여러 의견서와 변론요지서를 충분히 검토하셔서 합당한 결론을 내려주실 걸로 믿습니다.

변호인들께서 이미 충분히 변론하셔서 공소사실에 대해서 구구절절이 변명하기보단 이번 수사와 재판을 체험하면서 제가 느낀 몇 가지 소회와 솔직한 심경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최후 진술을 갈음하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부터 약 32년 전인 1987년 11월 3일 학생의 날을 기념해서 개최됐던 서울 명동 부근에서 개최됐던 시위 현장에서 체포돼 3일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다가 즉결심판에서 집시법 위반에 대해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독립되고 공정한 법관임을 제 눈으로 직접 목격, 판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후 많은 세월이 흘러 25년 동안 판사로 살았던 제가,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공소장에는 제가 꿈꾸며 추구하고 살아왔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피고인 유해용이 묘사돼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공평무사하게 직분을 감당하고, 분수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공무상 비밀을 누설하고 직권을 남용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코 부정한 이익을 향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변호사 영업에 활용하려고 보고서를 훔친 절도범이 되어 버렸습니다.

법원을 떠나며 다짐한 대로 품위 있는 변호사 되기 위해 사무장도 두지 않고 편법적인 수임이나 변론한 적도 없었고, 받은 수임료는 전부 세무신고 하였음에도 변호사법 위반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이 어느새 범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자격도 능력도 되지 않았던 제가 감히 수석, 선임재판연구관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 우연이고 행운이었다면 그 업보로 오늘 피고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고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피고인 주제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외람됩니다만, 이번 일을 통해 저는 우리의 수사 현실이나 관행에서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많은 문제점을 보게 됐습니다.

피고인 입장에서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건 피의사실 공표를 통한 여론몰이입니다. 이는 무죄추정 원칙이나 편견과 예단 없는 공정한 재판의 근간을 허무는 것입니다.

저는 수사 과정에서 대대적 언론보도로 파렴직한 범죄자로 낙인 찍히면서 점점 막다른 벼랑으로 떠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서라도 저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결백을 증명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그 암흑 같은 절망의 시간에 저를 지탱해 준 몇 가지 버팀목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절대로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고 저를 철석같이 믿어주고 응원해준 가족, 지인들, 많은 법조계 선후배분들, 그리고 의뢰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제가 오랜 기간 판사였고 한때는 재판연구관들을 대표하는 얼굴이었기에, 쉽게 무릎 꿇을 수 없다는 자부심과 소명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마지막은 재판에 가면 결국 모든 진실이 드러날 거라는 기대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검사님께서 기소한 범죄 혐의사실에는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고, 억울하고 결백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50년이 넘는 지난 삶을 돌아보니 죄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가족들을 포함해 저를 사랑하고 응원해준 많은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들고 마음 졸이게 한 죄, 한번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으면 남의 충고 귀담아듣지 않고 타협하지 않은 죄, 후배 연구관들 포함해 주변 많은 사람들이 검찰 조사를 받게 만든 죄, 이유 불문하고 사회적 논란을 일으켜 법원의 명예와 신뢰를 실추시킨 죄, 제가 누리는 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감사할 줄 몰랐던 죄.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평생 살아오면서 저지를 수많은 죄와 실수와 업보를 생각하면 저는 분명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입니다.

만약 재판부께서 뜻밖에도 제게 유죄판결 내리신다면 지난날의 모든 허물과 잘못에 대한 인과응보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제 재판부의 공정하고 현명하고 자비로운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재판부에 인사]"

유 변호사에 대한 1심 판결은 내년 1월 13일에 선고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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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16 19:39:38
    취재K
"진술에 앞서서 최초 변론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 저의 진술 내용이 공판조서에 제대로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검찰이 '사법농단' 의혹 수사를 거쳐 재판에 넘긴 전·현직 법관은 모두 14명. 그 가운데 처음으로 오늘(16일) 한 전직 법관의 1심 재판이 약 7개월 만에 마무리됐습니다. 사법연수원 교수와 대법원 선임·수석재판연구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지내고 지난해 2월 퇴임한 유해용 전 판사(사법연수원 19기·現 유해용법률사무소 변호사)가 그 주인공입니다.

검찰은 지난해 9월 이후 유해용 변호사의 사무실을 두 차례 압수수색했다.
유해용 변호사는 2016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으로 재직하면서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의 지시를 받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박채윤 씨의 특허소송 상고심과 관련해 사건의 진행경과와 처리계획 등을 정리한 '사안요약' 문건을 모 재판연구관에게 작성하게 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해당 문건을 임 전 차장을 통해 청와대로 전달한 혐의(공무상비밀누설)를 받습니다. 다만 검찰은 오늘 결심공판에 이르러, 이 문건을 요구하고 전달받은 당사자를 청와대가 아닌 "사법부 외부의 성명불상자"로 바꾼 뒤 같은 내용의 혐의를 예비적 공소사실로 추가했습니다.

유 변호사는 또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대법원 선임·수석재판연구관으로 재직하면서 입수한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의 전자문서파일을 정당한 권한없이 절취, 반출해 변호사 영업에 활용한 혐의(절도,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도 받습니다.

이 같은 공소사실에 대해 유 변호사 측은 시종일관 전부 부인해 왔습니다.

그는 우선 자신이 '사안요약' 문건 작성을 재판연구관에게 지시했는지, 그 문건을 받아 임종헌 전 차장에게 전달했는지, 해당 문건이 청와대에 전달했는지가 증명되지 않았다며 검찰이 주장하는 사실관계부터 부정하고 있습니다. 또 재판연구관의 지위나 사안요약 문건의 성격을 따져볼 때 법리적으로도 직권남용이나 공무상비밀누설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 반출과 관련해서도 대법원 재직 당시 총괄재판연구관이 취합해 준 검토보고서를 저장한 것일 뿐 의식적으로 수집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오랜 업무 스타일에 따라 종전 근무지에서 사용했던 파일들을 가지고 나와 변호사 사무실 PC에 옮겨둔 것일 뿐이고, 이를 변호사 영업에 활용하려는 목적도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검찰이 이 범죄 혐의의 증거로 든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 목록 등은 위법수집증거에 해당한다며, 공소를 기각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유 변호사는 또 이 사건 재판 과정에서 "현행 피의자신문 제도와 그 결과물인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한 광범위한 증거능력 인정은 피고인의 방어권을 결정적으로 제약하고 있고, 헌법이 보장하는 진술거부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형사소송법 200조와 312조 1항, 2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습니다.

유해용 변호사가 헌법소원심판청구를 하면서 기자들에게 배포한 참고자료의 일부.
검찰은 오늘 결심공판에서 유 변호사가 "대법원 재판의 공정성과 그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심각히 훼손"했고, "압수수색 과정에서 중요한 증거인 검토보고서 등을 수차례에 걸쳐 삭제, 파기하는 등 인멸하고 검찰에서의 진술을 만연히 번복하는 등 범행 일체를 부인하며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지 않다"며 징역 1년 6월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습니다.

오늘 재판의 마지막 순서로 피고인인 유 변호사에게 재판부 앞에서 최후 진술의 기회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조서에 제대로 기록해달라고 특별히 요청하기도 했는데, 7분 동안의 발언 내용을 여기에도 기록해 둡니다. (최대한 빠짐없이 받아 치려 노력했지만 현실적 여건의 한계로 일부 놓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골치 아프고 부담스러운 사건을 충실하고 공정하게 심리해주시고 피고인 측에도 공평한 기회를 주신 재판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의례적 인사는 아니고 진심으로 드리는 감사의 말씀입니다. [재판부에 인사]

어느 책에서 '인생 최대의 비극은 관점의 차이'라고 쓰여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만, 처음 수사 때부터 재판 때까지 검사님들과 피고인 사이의 그런 불신과 깊은 간격이 놓여 있는 데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서로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달라 당연한 얘기일 거 같습니다. 다만 제 입장에서는 오늘 검사님들의 의견 진술 내용 중에서, 객관적인 자료나 또 진술 내용 등에 검찰 측에 유리한 일부만 인용하신 부분이 많아서 저희들이 그동안 제출했던 여러 의견서와 변론요지서를 충분히 검토하셔서 합당한 결론을 내려주실 걸로 믿습니다.

변호인들께서 이미 충분히 변론하셔서 공소사실에 대해서 구구절절이 변명하기보단 이번 수사와 재판을 체험하면서 제가 느낀 몇 가지 소회와 솔직한 심경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최후 진술을 갈음하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부터 약 32년 전인 1987년 11월 3일 학생의 날을 기념해서 개최됐던 서울 명동 부근에서 개최됐던 시위 현장에서 체포돼 3일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다가 즉결심판에서 집시법 위반에 대해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독립되고 공정한 법관임을 제 눈으로 직접 목격, 판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후 많은 세월이 흘러 25년 동안 판사로 살았던 제가,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공소장에는 제가 꿈꾸며 추구하고 살아왔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피고인 유해용이 묘사돼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공평무사하게 직분을 감당하고, 분수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공무상 비밀을 누설하고 직권을 남용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코 부정한 이익을 향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변호사 영업에 활용하려고 보고서를 훔친 절도범이 되어 버렸습니다.

법원을 떠나며 다짐한 대로 품위 있는 변호사 되기 위해 사무장도 두지 않고 편법적인 수임이나 변론한 적도 없었고, 받은 수임료는 전부 세무신고 하였음에도 변호사법 위반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이 어느새 범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자격도 능력도 되지 않았던 제가 감히 수석, 선임재판연구관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 우연이고 행운이었다면 그 업보로 오늘 피고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고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피고인 주제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외람됩니다만, 이번 일을 통해 저는 우리의 수사 현실이나 관행에서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많은 문제점을 보게 됐습니다.

피고인 입장에서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건 피의사실 공표를 통한 여론몰이입니다. 이는 무죄추정 원칙이나 편견과 예단 없는 공정한 재판의 근간을 허무는 것입니다.

저는 수사 과정에서 대대적 언론보도로 파렴직한 범죄자로 낙인 찍히면서 점점 막다른 벼랑으로 떠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서라도 저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결백을 증명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그 암흑 같은 절망의 시간에 저를 지탱해 준 몇 가지 버팀목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절대로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고 저를 철석같이 믿어주고 응원해준 가족, 지인들, 많은 법조계 선후배분들, 그리고 의뢰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제가 오랜 기간 판사였고 한때는 재판연구관들을 대표하는 얼굴이었기에, 쉽게 무릎 꿇을 수 없다는 자부심과 소명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마지막은 재판에 가면 결국 모든 진실이 드러날 거라는 기대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검사님께서 기소한 범죄 혐의사실에는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고, 억울하고 결백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50년이 넘는 지난 삶을 돌아보니 죄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가족들을 포함해 저를 사랑하고 응원해준 많은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들고 마음 졸이게 한 죄, 한번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으면 남의 충고 귀담아듣지 않고 타협하지 않은 죄, 후배 연구관들 포함해 주변 많은 사람들이 검찰 조사를 받게 만든 죄, 이유 불문하고 사회적 논란을 일으켜 법원의 명예와 신뢰를 실추시킨 죄, 제가 누리는 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감사할 줄 몰랐던 죄.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평생 살아오면서 저지를 수많은 죄와 실수와 업보를 생각하면 저는 분명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입니다.

만약 재판부께서 뜻밖에도 제게 유죄판결 내리신다면 지난날의 모든 허물과 잘못에 대한 인과응보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제 재판부의 공정하고 현명하고 자비로운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재판부에 인사]"

유 변호사에 대한 1심 판결은 내년 1월 13일에 선고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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